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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역사와 현실]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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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 생각에 정조 임금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에 다소 진보적인 면도 없진 않았다. 영세 상인들에게 생업의 기회를 보장하고, 길가에서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준 것이 그러했다. 그러나 대체로 정조는 옛 제도의 답습에 머물 때가 많았다. 가령 규장각을 두어 집현전을 모방한 것이며, 조선 태종 때의 신문고 제도를 모방하는 식이었다.

좀 더 알고 보면 정조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한 왕이었다. 조선의 군주 27명 가운데 정조는 문집을 저술한 유일한 왕이었다. <홍재전서>라는 왕의 문집은 무려 184권의 거질이다. 하지만 정조는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하지 않았고, 자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는 의지도 빈약했다. 그가 순수한 고전적 문체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취지로 추진한 ‘문체반정’ 같은 것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이 보수적인 정책이었다.

정조는 ‘정학’, 곧 성리학을 내세우며 다수의 무명 지식인들을 억압하였다. 그중에는 나의 관심을 끄는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새로운 이상을 품었다는 이유로 출셋길이 막혔다.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등 막심한 고난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에는 그들의 언행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기득권층은 그들을 ‘사기꾼’ 또는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로 낙인찍기 일쑤였다. 문화계의 블랙리스트는 정조시대의 어둠이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있다. 강이천을 아시는가? 그는 화가이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강세황의 손자였다. 어린 시절 이미 천재로 소문이 나서 정조를 알현하기도 했다. 이런 강이천은 일찍이 명나라, 청나라의 신문학 작품을 즐겨 읽었다. 자연히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이 그의 내면에 일어났다.

강이천은 보수적인 성리학자들이 고집하는 사회질서의 타당성을 의심했다.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성리학은 그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그보다는 일상의 경험에서 우러난 주관적 감성과 지혜가 강이천에게는 더욱 귀중했다. 그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늪에서 빠져나와 <정감록>을 탐독하며 대안을 모색했다. 또, 서학(천주교)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정조의 시대가 금지한 일련의 책들을 읽은 나머지, 강이천은 유배를 당했다. 패가망신의 악운이 그와 그의 벗들을 덮쳤다.

생각할수록 강이천처럼 비명에 간 무명의 지식인들이야말로 귀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온 한줄기 서광이었다. 정조처럼 유식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사람만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내게는 외려 강이천과 같은 사람들이 더욱 소중한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강이천은 새 세상을 열려고 끙끙거리다 몰매를 맞고 쓰러졌지만, 아직도 다들 손뼉 치며 좋아하는 정조 같은 권력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그는 보수반동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든가. 그러나 이런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별로 없다.

우리 시대의 역사가들은 여전히 정조와 그의 시대를 높이 평가한다. 정조야말로 조선후기 사회를 혁신하고 ‘문예부흥’을 일으킨 ‘개혁군주’라든가, 그처럼 어진 군주의 정신이 맥맥이 이어졌더라면 망국의 비운은 없었을 것이라든가.

내가 보기에는 그 시대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정조와 그가 아끼는 신하들은 성리학적 이념의 포로였다. 그들은 낡은 통치방식을 고집함으로써 다가올 19세기의 역사적 암운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꿈틀거리고 있던 서세동점의 역사적 기운을 무시한 채, 그들은 까마득히 먼 고전시대로의 회귀를 몽상하였다.

정조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누구보다 영리하고 부지런한 학자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퇴행적인 역사적 행보가 쌓여갔다. 스스로를 ‘군사’, 곧 철인 왕으로 여겼던 정조가 이끈 조선은 시대의 물결에 뒤처지며, 머지않아 터지고 말 시한폭탄을 남겨놓았다.

정조는 선의를 가진 임금이었을 테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참담했다. 역사의 전개 과정은 우리의 통념을 배신할 때가 많다. 우리의 소망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때도 많은 것이다. 가령 고도산업화 또는 경제성장 역시 사회구성원들에게 넉넉하고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재부가 극소수에게 집중되고 마는 현실을 직시하자.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목격되는 일이지만, 자본의 전성시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촉발한다. 역사는 이성과 논리로 결판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이런 점 때문에 현대 독일의 인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말했다. 역사란 우연과 광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이다.

최근 한국 사회는 큰 고비를 무사히 넘었다. 부패한 권력자를 권좌에서 몰아냈고,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아직도 과거의 권력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시민사회는 이성과 관용의 힘으로 그들을 설득해, 새 한국을 만들 수 있을까? ‘그래도 역사는 자유와 평등의 실천무대여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은 구제될 수 있을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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