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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수)

[편집국에서] 애경사의 파국, 스페이스빔의 미래 / 김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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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단 2시간. 100년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그뿐이었다.

지난달 30일 오전 페이스북의 한 타임라인에서는 건물의 철거 현장이 중계됐다. 인천 중구 송월동에 위치한 붉은 벽돌 건물 세채가 포클레인 한대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건물 이름은 애경사. 애경그룹이 창업한 해인 1954년 인수해 1962년 매각한 비누공장으로 이 공장의 역사는 19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대의 양조장, 정미소, 전기회사 등과 함께 개항 초기 산업사의 중요한 한 풍경으로 한 세기를 버텨온 근대산업유산이 두시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철거를 앞두고 나온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문화유산의 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중구청은 철거 소식이 중앙 언론에까지 타전되자 그제야 그 가치를 몰랐다며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그나마 보도가 되면서 ‘부음’ 기사라도 나온 애경사는 나은 형편인지 모르겠다.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아래 있던 동구 송림동 한옥여관은 지난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1938년에 지어져 1989년까지 여관으로 쓰였다는 이 한옥은 건축이나 역사의 문외한이 겉에서만 봐도 방방마다 올라간 벽돌 굴뚝이 신기해 안을 기웃거리게 되는 독특한 건물이었다. 2011년 인하대박물관 조사팀이 이 건물의 건축적 역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과 보존을 위한 제언을 보고서로 남겼지만 헛수고가 됐다. 만석동에 위치했던 조선기계공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 숙소(추정)는 어떤가. 겉모습은 일반 창고 모양으로 거의 훼손됐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2층의 목재 발코니 구조가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이 건물도 사망신고조차 확인할 겨를 없이 없어졌다.

백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전쟁통에도 살아남은 이 강인한 건물들을 부순 힘은 뭘까. 주차장이다. 애경사는 송월동 동화마을 관광객 편의를 위한 공영주차장 증축을 위해 허물었고, 송림동 한옥여관은 근처 교회에서 건물을 사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조일양조장, 동방극장 같은 30~40년대 인천의 근대건축물들이 최근 2~3년 새 주차장에 자리를 내주며 헐려나갔다. 공공자산의 가치가 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단순히 ‘땅값’으로만 평가하는 지자체의 몰역사적 태도야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지만 관광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문화유산들을 가뿐하게 밀어버리는 판단에는 우려라는 표현도 아까운 지경이다.

최근 몇년 새 원도심 여행은 국내 여행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북촌과 서촌을 시작으로 인천, 부산, 군산 같은 도시들의 오래된 골목길로 그 세월을 살지 않았던 젊은 여행자들이 찾아간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도 그런 골목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양조장을 대안적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스페이스빔과 아벨서점 등이 주축이 되어 한때 쇠락을 거듭하기만 했던 골목에 문화적 온기를 불어넣으며 찬찬히 ‘동네’가 되살아났다. 요즘은 문화유산까지 쓸어버리며 주차장을 지원할 만큼 중구청이 그렇게나 아끼는 알록달록 송월동 동화마을보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애경사의 허탈한 철거 현장을 페이스북으로 중계하며 알린 이는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였다. 그에게 애경사의 비극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인천 지역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이 유서깊은 건물과 재계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한겨레> 4월17일치 ‘10년 공든 탑 스페이스빔 인천 문화버팀목 무너지나’) 한가지 다행은 지역 주민들과 예술인들이 이 공간의 시민자산화를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쉽게 애경사의 전철을 밟기에는 이제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인천시와 동구청은 알아야 할 것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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