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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산모 흡연·음주 멈추게 한 '가장 잘 연구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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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紙 수석에디터 피어슨, 4년간 150명 만나며 취재

영국 7만 명 삶 추적한 연구

조사에 천문학적 시간·비용 들여 잘못된 상식 바꿔준 '무명씨'들

조선일보

라이프 프로젝트

헬렌 피어슨 지음|이영아 옮김
와이즈베리|392쪽|1만8000원


"임신해도 술 한두 잔 마시는 건 괜찮아. 담배도 피워야지. 산모가 아이 낳고 침대에서 2주씩 쉴 필요는 또 뭐야. 곧바로 밀린 집안일부터 해야지."

지금 상식으로는 쉽게 믿기지 않지만, 20세기 중반 영국 산모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출산율은 떨어지고 영아생존율은 여전히 높았다. 영국은 1930년대 '이러다가는 저출산으로 나라가 없어지겠다'는 공포에 빠졌다. '1946년 출생 코호트'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코호트는 로마 시대 수백명으로 이뤄진 보병대(cohort)를 가리키던 말로 공통점을 가진 집단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같은 해 특정 시기 태어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뜻한다. 영국은 지금까지 다섯 세대(1946·1958·1970·1991·2000년 출생) 총 7만명 이상의 삶의 궤적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추적하고 있다.

지금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이 이 연구로부터 나왔다. 산모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 담배와 술을 멀리해야 한다. 산모의 건강을 위해 산후조리와 출산 휴가가 필요하다. 고소득층 아이 성적이 더 높다. 단 집이 가난해도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학습 능력은 높아질 수 있다.

영국 '무명씨'들 데이터를 1940년대부터 쌓아 올린 덕에 논문 6000여 편이 나왔다. 소규모 연구는 여러 나라에서 진행됐지만 연구 집단별로 1만명이 넘는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온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과학저널 '네이처' 수석에디터인 저자 헬렌 피어슨(47)은 이 '비용은 많이 들고, 주요 가설도 없고, 결과도 보장되지 않는 장기간 데이터 수집' 프로젝트가 어떻게 계속됐는지 원동력을 찾아 나선다. 4년 동안 150여 명을 취재한 그녀는 "영국의 출생 코호트 연구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연구자들이 영국인답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도중에 연구비 지원이 끊기기도 했고, 3년은 준비해야 하는 연구를 정부 지시 때문에 반년 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착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연구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70년 코호트 연구'. 당시 연구 책임자였던 네빌 버틀러 교수는 마거릿 대처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총리가 참여하는 리셉션 행사에서 찻잔을 떨어트리며 일부러 길을 가로막고(커피가 대처 총리에게 튀었다는 말도 있다) "총리님, 전국의 아이들을 연구하고 있는데 자금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사회과학은 좌파의 온상'이라고 비판하며 예산을 줄이려 했던 대처도 마음을 돌린다.

특정 시점을 찍어내는 '사진'이 아니라 일대기를 추적하는 '동영상'이다 보니 용량도 그만큼 컸다. 1940년대 연구진은 임신한 뒤 우유는 얼마나 먹었는지, 생선은 몇 마리를 먹었는지 따위의 세세한 질문이 담긴 수십장의 설문지를 약 1만5000명으로부터 받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이 정보는 천공카드(종이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를 기록하는 매체) 수십만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컴퓨터에 백업됐다.

돈·시간·인력은 늘 부족했고 결과는 더뎠다. 그나마 분석이 된 내용도 해석이 엇갈렸다. 집안 형편, 성장환경 같은 조건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보니 해석 여지가 컸기 때문. 초기 코호트 연구는 영아사망률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는데, 병원 분만과 가정 분만 중 어느 편이 생존율이 높은지에 대한 분석이 엇갈렸다. '부모의 조건이 자녀 삶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도 데이터를 취사선택해 자극적인 결과를 내놓았다는 비판에 마주쳐야 했다.

그러나 이 '국보'는 영국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게 도왔다. 영국국가보건서비스(NHS)는 연구를 토대로 임신·출산 무상 의료지원 정책을 도입했다. 출산 휴가도 이 연구로 탄생했다. 취학 전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이 취학 후 어휘·철자법·수학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는 연구는 도서관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1946년 코호트 연구는 영아 사망 원인을 가리기 위해 시작했다. 엄마 배 속에서 연구 대상자가 됐던 이들은 이제 '누가 치매에 걸리는가' 연구에 응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겠다는 '라이프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지구상에서 가장 잘 연구된 이 아이들 덕분에 우리가 태어나고, 공부하고, 양육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죽는 방식이 변했다."

[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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