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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신석호의 오늘과 내일]서훈 후보자의 잠 못 이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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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석호 국제부장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서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2월 동국대 북한학과를 졸업한 그의 논문은 통과되기 전부터 학계의 화제였다. 김정일을 가장 많이 만나 대화한 30년 대북 협상 전문가, 그것도 고급 북한 정보를 독점하는 현직 국정원 3차장이 쓴 박사학위 논문이라니.

논문 심사가 끝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짜고짜 동국대를 찾아가 심사위원들의 인주가 채 마르지 않은 논문 한 부를 얻었다. 본인에게 전화하면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아 논문을 꼼꼼히 읽고 소개하는 것으로 예의를 갖췄다. 2008년 3월 3일자 동아일보 A10면 톱기사였다.

1993년 이후 1, 2차 북핵 위기를 소재로 한 논문은 약소국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통해 강대국 미국을 어르고 때리는 강압외교를 ‘선군외교’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피포위 의식에서 나온 선군외교는 북한 정치에 뿌리를 내린 일종의 제도로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북-미 관계의 개선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 후보자는 그해 5월 논문을 고쳐 펴낸 저서 ‘북한의 선군외교’ 결론에서 “2008년은 북핵 문제 해결 및 북-미 관계 개선의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전년 6자회담 10·3합의에 따라 2008년 6월 영변 핵단지 냉각탑이 폭파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두 달 뒤 김정일이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지면서 북한 정치는 급격히 경직되고 보수화됐다. 군이 전면에 나서 핵·미사일을 끌어안은 채 3세 세습을 치러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김정은은 다음 해 4월 장거리로켓 발사와 5월 2차 핵실험으로 ‘선군외교’를 계속할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2012년 2월 24일 이화여대 교수실에서 만난 그는 “만 28년 동안을 공무원으로 지내고 밖에 나오니 너무 자유롭고 좋다”면서도 타결 직전의 북-미 대화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5일 뒤 2·29합의가 맺어졌다. 하지만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 생일 이틀 전인 4월 13일 다시 장거리로켓을 쏘며 판을 깼다.

10일 국정원장 후보자로 청와대 춘추관에 나타난 그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물꼬를 틀 수 있고, 최소한 한반도에 군사적인 긴장을 매우 낮출 수 있는 등 조건이 성숙하면 평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남북 대화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대선 직전 지인들에게는 “누가 집권하든 그날부터 밤샘과 격무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장은 청문회 준비에, 국정원 개혁이라는 내부 문제에 여념이 없겠지만 전공인 북한 문제를 들여다보면 난관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북한은 9년여 전보다 핵실험을 네 번이나 더 한 핵 보유 직전 상태다. 핵·미사일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국제사회의 대가와 비용이 그만큼 더 커졌다는 뜻이다.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계속 북한 문제를 어디로 끌고 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7년 차 독재자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보다 남북 대화를 주저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이 두 번의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햇볕정책 10년은 남한과 대화하다 탈이 나도 자신의 권력에 문제가 없을 것임을 확신한 말년의 김정일이었기에 가능했던 ‘예외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당시 서 후보자의 대화 파트너였던 장성택도, 김양건도 이젠 저세상 사람이 됐고 남북의 대화 라인은 끊어진 상태다.

그가 국정원장직을 마친 후 다시 쓸 논문에 ‘북한 선군외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적을 수 있을까? 의욕은 100%지만 걱정은 200%일 것 같다.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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