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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나의 삶 나의 길] “평생 정치·언론 가교역… 기자들과의 생활 큰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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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대변인’ 이규양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상임감사

시골 중학교 졸업 후 고교에 진학하지 않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정당의 맨바닥 직급인 기능직에서 출발해 당 대변인,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1급)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다. 이규양(66)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상임감사가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세계일보

40여년간 정치부 기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이규양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상임감사는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와 정당의 공보업무를 수행하며 수많은 논평과 성명을 발표했지만 한번도 고소·고발을 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윗분으로부터 지적을 당하지 않았다”며 “언론인들한테 순발력과 균형감각 등을 배운 덕분”이라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1966년 6월 경북 안동 조밭에서 잡초를 솎고 있던 10대 청년에게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당시 민주공화당 사진실장으로 근무하는 큰자형이 보낸 것이다. “기자실에 연락원이 필요한데, 할 의사가 있으면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봐 달라고 큰자형한테 부탁한 터라 그 길로 상경했다. 공화당 기자실에서 전화를 받아 출입기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등 잔심부름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연락원으로서 그의 서울생활은 시작됐다.

진학에 미련이 남아 있던 그는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지자 당사와 가까운 대동상고 야간부에 입학해 주경야독으로 어렵게 졸업장을 쥐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발로 뛰어 기사를 발굴해 편집국에 송고하는 기자들의 생생한 취재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예상하지 못했던 정국 현안이 발생하면 대응방안 등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또 정국을 조망하는 능력과 감각도 지니게 됐다. 대변인과 부대변인 시절엔 그가 말한 것이 그대로 당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될 정도였다. 이 감사는 “40여년간 정당, 국회 출입 기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터득한 것이 대변인직을 수행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국민이 편안하고 알아듣기 쉬운 내용으로 성명, 논평을 발표하는 게 대변인의 기본 덕목이라고 설파했다. 또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는 순발력과 장기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당의 입인 대변인은 논평 하나, 성명 하나에 당의 이념과 정체성은 물론 역사인식까지 내재돼야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세계일보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 시절 이만섭 의장과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감사.


그가 정당에 첫발을 내디딘 때는 기자실에 당 사무처 직원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혼자 일을 도맡아야 했다. 당시엔 대변인의 국회 소속 비서관 2명과 여직원 1명이 기자실에 파견돼 지원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민정당에 있으며 당과 언론의 가교 역할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행정지원이 절실하다는 판단에 따라 당 지도부에 대변인 행정실 기구의 필요성을 건의해 관철시켰다. 그와 사무처 직원 1명으로 시작했고, 현재 여야가 운영하는 대변인 행정실은 이 감사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월 농수산식품유통공사 감사에 취임한 그는 직원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기자와 만난 이 감사는 세월이 흘러도 대변인 DNA가 뼛속까지 배어 있는 듯했다. 인터뷰 도중 언론인 얘기가 나오자 전화로 기사를 부르는 흉내를 내는 등 영락없는 ‘대변인 이규양’이었다.

―기능직에서 시작해 대변인실 행정실장, 대변인, 국회의장 공보 수석비서관까지 올랐다.

“민주공화당 연락원으로 출발했고, 야간 고교 졸업 후엔 홍보국 서기(보조요원)로 승진해 홍보업무를 계속하다 기능직 요원에서 정식 사무처 요원인 간사로 승진했다. 공화당 창당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무총장이 여러 차례 특별승진을 제의했으나 공정하지 않은 승진은 후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생각에 정중히 거절했다. 열정을 갖고 일했고,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등 정도를 걸었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큰 애로점은 없었다. 정당이나 국회에는 최고의 학력과 실력을 겸비한 선배, 동료, 후배들이 많았다. 선배에게는 성실한 후배로, 동료에게는 신뢰하는 친구로, 후배에게는 통솔력 있는 선배로 관계를 유지하며 나 자신과 끝없이 싸워가며 일해왔다.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록 상고 출신이지만 모시던 윗분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비교적 힘들지 않게 일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자리를 위해 누구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나한테 사전 통보 없이 국회의장실 공보비서관으로 발령을 내 당시 대변인이 무척 서운해했다. 대변인은 내가 박 전 의장의 연락을 미리 받고 자신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오해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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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방송대를 뒤늦게 졸업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외부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평가할 때 짧은 학력은 제약 요인이 되더라. 학력 제한으로 여러 차례 불이익을 받거나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기자와 대변인은.

“동아일보 이진희 기자(전 문화공보부 장관)는 개성이 무척 강했다. 기자들은 사건이 터지면 뛰는데 이 기자한테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현 전남도지사)는 기자정신이 투철했고, KBS 김인규 기자(전 KBS 사장)는 상황분석과 파악이 빨랐다. 조선일보 김용태 기자(전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변인)는 (1972년 8월 남북 적십자회담 취재 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현장에서 ‘여기는 평양,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고 송고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평양은 미지의 세계였다. 검사 출신 박희태 대변인(전 국회의장)은 순발력이 뛰어났다. 김용태 대변인의 논평은 쓸데없는 단어가 한 자도 없었고 명쾌했다. 한국일보 출신 심명보 (민정당) 대변인은 8절지 용지 3장에 논평을 할 정도로 장문을 선호했다. 기자들이 취사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심 대변인은 경비원, 청소원 등을 철저히 챙겼다. 성격 급한 기자 출신 대변인이 더러 있었다. 모 대변인은 성명 초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뒤 내 자리에 와서 앉기가 무섭게 ‘다 됐나‘라고 재촉하는 등 숨 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신속성을 요구했다. 나중엔 대변인 지침이 떨어지면 말이 되든 안 되든 머릿속에서 핵심부터 떠오르는 습성이 생기더라. 그런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단련된 것이 대변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국회의장을 두 분 모셨다.

“이만섭, 박준규 전 의장을 모셨다. 이 전 의장은 성품이 강직하며 정이 많았다. 내가 큰 목소리로 이 전 의장과 다른 입장을 고집해도 전혀 언짢아하지 않고 수용할 만큼 큰 그릇이었다. 이 전 의장은 ‘정치는 꾀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 변칙 없는 정치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또 ‘정치와 연애는 계산하면 안 돼’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재임 시절엔 본회의장에서 사회를 볼 때 한번은 여당, 한번은 야당, 그리고 한번은 국민을 바라보며 의사봉을 세 번 쳤고, 날치기 없는 국회상을 정립했다. 2001년 4월 당시 한국과 국교 수립이 안 된 쿠바를 방문해 쿠바 내 한국무역사무소 설치를 합의한 일은 의회외교의 큰 성과로 꼽힌다.

박 전 의장은 9선을 하며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로만 당선됐다. 헌정사에서 9선 의원을 역임한 인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 박 전 의장, 김종필 전 국무총리 단 3명이다. 박 전 의장은 13,14,15대 국회에서 잇달아 세 차례 국회의장을 지내는 기록을 세웠다.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후 국회개혁을 위해 의장의 당적 이탈이 필요하다며 탈당하는 첫 사례를 남겼다. 그분은 다방면에 해박해 대통령을 시험으로 뽑는다면 당선됐을 것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났고, ‘니 와 나한테 말 논나(놓나)’라고 우스갯소리도 자주 하셨다.”

―일화를 소개하면.

“1997년 15대 대선 때다. 자민련 수석부대변인을 하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의 불씨를 지폈고 그것이 도화선이 돼 결국 큰 이슈가 돼 버렸다.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자격과 결부시켜 문제 제기를 했고, 이 후보는 아들 병역비리 의혹 때문에 지지도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김종필 총재가 나를 불러 ‘의혹 제기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여당 후보는 돈과 권력, 조직이 있어 언제든지 지지도가 반등할 개연성이 있어 차제에 주저앉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더니 김 총재는 ‘이 후보가 사퇴하면 대선 구도가 바뀔 수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 후엔 아들 병역 비리 의혹 대신 이 후보 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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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기자단 내외 만찬 자리에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감사.


―국회의원 출마 생각은 없었나.

“그동안 출입기자들로부터 출마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평생을 정치 현장에서 보냈는데 왜 뜻이 없었겠는가. 1996년 15대 총선 때 자민련 수석부대변인 시절 비례대표 예비후보 20번으로 등록했으나 당선권에 들지 못했다. 16대 총선에선 자민련 경북 안동 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준비를 했으나 당선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출마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국회를 출입했던 정치부 기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을 추진했는데 성사되지 못했다. 2006년 (재)새시대희망재단을 발족, 10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국회사무처에 신청을 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아 유야무야됐다. 정치부 출신 기자들이 국회와 의회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방안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세계일보

―좌우명은.

“맹자의 ‘출호이자 반호이자(出乎爾者 反乎爾者)’이다. 네가 뿌린 일은 네게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내가 한 모든 언행은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정당과 공직생활을 하며 좌우명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기자를 하고 싶지는 않았나.

“에이, 능력이 되지 않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 김정훈 전 연합통신 편집국장 등과 함께 주간 장애복지신문을 창간해 초대 상무이사를 맡아 장애인 복지향상과 권익증진에 앞장선 일이 있다. 기자와 평생 인연을 맺은 것은 나로선 행복이다. 기자는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를 해야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솔직한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등 깊이 있는 취재가 가능하다. 요즘은 취재원 입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보도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이규양은

△195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 대동상고 졸,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졸, 단국대 행정대학원 수료,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감사인 과정 수료 △민주공화당 홍보국 연락원, 서기(기능직) 간사(행정직), 민주정의당 선전부 참여(대변인실 파견) 대변인실 부장, 부국장 △민자당 대변인실 행정실장 △제13대 국회의장 공보비서관(2,3급) 제14대 국회의장 공보비서관(2급) 제16대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1급) △주간 장애복지신문 상무 △자민련 대변인, 수석 부대변인, 홍보위원장, 경북 안동을 지구당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 후보 중앙선대위 부대변인, 경북도 부위원장 △(사)고구려예술단 이사장 (사)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이사·대변인, 자유수호 국민연합 공동총재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상임감사(현) △2017 미래감사포럼 조직위원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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