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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남의 영화 훔쳐 떼돈 번, 세계 첫 '영화 불법 다운로더'는 에디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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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의 불편한 진실, 조르주 멜리에스 '달세계 여행' 훔쳐온 사연

아시아경제

토마스 에디슨은 당대의 무수한 발명 및 특허출원 성과로 '발명왕'이라 불렸으나, 그의 대표 발명품인 전구, 축음기, 영사기는 발명이 아닌 개량, 또는 도용해 그가 상용화 시킨 상품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당대 유럽의 흥행영화 '달세계 여행'의 필름을 몰래 미국에 들여와 상영, 큰 돈을 편취하기도 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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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사드배치 논란에 즉각 보복 조치에 들어간 중국의 단호한 입장은 중국내 한류열풍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급기야 중국 내 한국 제작 콘텐츠 또는 한국 연예인 출연 광고, 콘텐츠 송출을 금지하는 ‘한한령’까지 내려졌으나, 암암리에 불법 복제 및 다운로드로 국내 드라마 및 영화는 꾸준히 대륙 팬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법으로도 막기 어려운 콘텐츠 불법 다운로드의 기원을 쫓아보면 놀랍게도 100여 년 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이 등장해 놀라움을 선사한다.


▲ 조르주 멜리에스가 1902년 공개한 최초의 SF영화 '달세계 여행'

인간 달 착륙 그린 최고의 흥행영화

영화의 기원을 어디에 둬야 하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꼽지만, 영화의 발명 이후 극적 요소를 갖춘 근대적 영화의 효시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으로 본다.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각색, 인간이 대포를 쏴 달로 간다는 이야기를 획기적인 시각기법을 통해 영상으로 보여준 조르주 멜리에스는 이 영화가 유럽 전역에서 흥행에 성공하자 곧장 미국 진출을 계획하지만, 정작 이 영화로 미국 전역에서 돈을 번 사람은 다름 아닌 토머스 에디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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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닥 이스트만이 최초의 상용 투명필름을 발명하자 에디슨은 여기에 영상을 입히는 카메라를 발명했지만 이미 '최초'라는 타이틀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가져간 뒤였다.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들이 발명한 영사 방식을 도입, 영화 특허회사를 만들고 시장을 독점해나갔다. 사진 왼쪽 코닥 이스트만, 오른쪽 토머스 에디슨 사진 = Kod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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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과 특허의 제왕, 영화를 훔치다

에디슨은 일찍이 영화의 상업적 가치를 알아보고 촬영과 영사가 가능한 장치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차였다. 1892년 그가 기용한 기술자 윌리엄 딕슨이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 그리고 촬영물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자 특허를 낸 에디슨은 더 효율적인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방식을 차용해 영화특허회사를 만들고 시장을 독점해나갔다.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달세계 여행’ 정보를 입수한 에디슨은 영화 필름 1권을 유럽에서 빼돌려 불법복제한 뒤 자신이 갖고 있던 배급망을 통해 상영,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원작자인 조르주 멜리에스가 미국에 진출하려 했을 땐 이미 에디슨의 불법복제 필름으로 많은 대중이 영화를 관람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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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에디슨의 대표 발명품인 전구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발명하고 개량해놓은 것을 그가 보다 편리하게 바꿔 상용화한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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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치고도 더 당당했던 사내

멜리에스의 창작물을 통째로 훔쳐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도 에디슨이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던 까닭은 그는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세계 여행’ 사건은 창작물 복제 상영이란 오명을 피하기 어려운 범죄였지만, 당시엔 라이선스에 대한 국제적 기준과 협약이 모호했고 영화의 발명이 오래지 않았던 때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 수출에 실패한 조르주 멜리에스는 파산 후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그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전구 발명 역시 최초 발명자는 따로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제임스 린제이가 1835년 백열전구를 처음 발명했고, 1875년 이를 개량한 백열등으로 영국의 화학자 조셉 스완의 아이디어를 에디슨이 그대로 도용해 좀 더 발전시킨 뒤 특허를 내 판매에 나서 명성을 얻은 것. 따라서 그는 전구 발명자라기 보단 전구 개량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발명가로서의 감각은 조금 부족했을지언정 상업적 감각이 탁월했던 그의 수완 때문에 세상은 그를 전구 발명가로 기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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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축음기 '포노그라프' 역시 프랑스의 발명가가 개발한 축음기의 설계를 가져와 보다 최신 기술을 접목해 음질을 개선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사진 = 자신이 개발한 축음기 포노그라프 앞에서 포즈 취하는 에디슨, Mathew Brady in Washington, April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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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장례식날도 연구실에

에디슨의 발명작으로 알려진 축음기 역시 프랑스 발명가 샤를 크로스의 ‘팔레오폰’이란 축음기구 설계를 에디슨이 입수, 아이디어를 도용한 뒤 8개월 뒤 축음기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생전의 에디슨은 "산업과 상업에선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며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며 살았다"고 당당히 밝힌 바 있다.

1%의 영감이 없어 99% 노력을 기울이기에 주저함이 없던 그의 삶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그 단면을 유추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의 죽음에도 업무가 바쁘다며 장례식조차 가지 않았고,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자녀들 중 아버지와 가장 친밀한 관계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 평생 동안 아버지 얼굴을 본 시간을 다 합쳐도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고 고백할 정도로 에디슨은 가정에 소홀했던 0점 아빠였다.

그는 발명보단 상용화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업가였으며, 재능 대신 안목과 노력을 바탕으로 무려 2,332개의 발명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중 그가 순수하게 만들어 낸 것이 몇 개나 될지는 의문이나 그럼에도 그는 타인의 재주를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를 잘 알고 있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그 역시 스스로 고백했다. "나도 많은 것을 훔치며 살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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