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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역사와 현실] 화가 고야의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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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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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없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해양제국 스페인의 영광을 기념하는 초대형 박물관이 하나쯤 있을 법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박물관은 세 곳이다. 첫째는 프라도, 둘째는 소피아, 셋째는 티센 보르네미사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프라도로, 그 명성은 세계적이다.

이 세 박물관을 우리는 미술관이라고 부른다. 전시된 유물이 미술품 일색이라서 그러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술을 중히 여길까?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답이 보인다. 근대 유럽 각국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특히 그들의 조각과 그림을 모방했다. 스페인은 유독 심했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또 그들은 대서양 무역시대를 열었던 만큼, 과거 지중해 무역을 이끈 이탈리아를 문화적으로도 넘어서고자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스페인은 잉카와 마야 문명을 무너뜨리고, 금과 은을 강탈했다. 많은 원주민들이 강제노동으로 광산에서 숨졌다. 이렇게 획득한 금은보화로 스페인은 휘황찬란한 예술작품을 빚었다. 졸부나 다름없었던 스페인의 왕과 귀족들은 로마교황청의 권위에 기대고자 신교와의 종교전쟁에도 거금을 쏟아부었다. 유럽은 장기간에 걸친 종교전쟁으로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스페인의 영광도 오래지 않아 막을 내렸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거나 새로운 사상을 싹 틔우지도 못한 채, 패권을 영국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미술만은 발전을 거듭했다. 스페인 왕실은 지속적으로 화가들을 후원했고, 이것이 전통으로 굳어졌다. 이 밖에 스페인에는 독특한 회화문화가 융성할 문화적 기운이 존재했다. 이슬람의 영향이었다. 8세기부터 15세기 후반까지 스페인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슬람의 색채감과 기하학적 사물 인식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스페인은 이슬람 등의 이교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종교재판이 혹독했고, 그 결과 미술에서 은유와 상징의 기법이 더욱 교묘해졌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융합되어 스페인에는 독특한 미술문화가 발달했다.

경향신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지난겨울 나는 마드리드에 머물렀다. 덕분에 여러 차례 프라도미술관을 관람했다. 보면 볼수록 스페인 미술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스페인 회화의 3대 거장이라 할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실로 매력적이었다. 처음엔 그들 3인의 작품을 하루에 다 둘러보았으나 나중에는 한 화가의 작품도 특정한 시기의 것만 따로 감상했다. 어느 날 하루는 고야의 후기 화풍, 즉 ‘검은 그림들(블랙 페인팅)’만을 감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거장들의 그림을 즐기는 가운데 내게 두 가지 생각이 저절로 일어났다. 첫째, 거장들의 그림 앞에서 나는, 무언중에 역사가의 길을 거듭 물었다. 그들의 답은 명확해 보였다. ‘보이는 것 그대로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 우리는 보이는 것도 지워야 하며,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묘사한다.’ 화가의 길이 역사가의 길과 똑같을 리 없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스페인 화가들이 정열을 쏟아 이룩한 시각예술의 세계는, 내가 오랫동안 암중모색해온 역사가의 길과 흡사한 것이 아닐까. 엘 그레코의 깨우침대로 ‘형체보다는 색채가 우선한다’. 내 식으로 말해, 단편적 사실 또는 개별의 사건보다는 역사적 맥락 또는 역사적 해석이 우선한다고 볼 수 없을까.

둘째, 프라도에서 내가 만난 거장들은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의 인생행로도 순탄하지 못했다. 그들은 생의 도처에서 곤경에 빠졌고 세상의 지탄을 받았다. 고야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어떤 점에서는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기성체제의 비판자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세월에 묻혀 쉬 잊혀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후세는 그들의 공적을 기억했다. 그들은 지배질서와 정면 대결하기 어려워, 체제에 맞설 미학적 구도를 설계하는 데 몰입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에는 추상성이 강하게 배어 있다. 후세는 뒤늦게 그들의 외침을 재발견하고 탄복했다.

프라도의 거장들은 일상의 하찮은 주인공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했고, 완강한 지배질서에 저항했다. 그런 점에서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는 나의 스승이다. 고야는 그 둘을 합한 것보다도 깊은 의미에서 내 영혼을 흔들었다.

이러한 상념의 끝자락에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있다. 태극기를 몸에 휘감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대는 한 무리의 광신자들이 있고, 교활함을 자랑하는 권력자들과 억만장자의 구역질나는 무도회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들보다 억만배 귀중한 나의 벗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아직도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역사적 고야는 이미 죽었고, 그래서 나는 겨울비 속에 그의 무덤을 찾아 애도의 마음을 전했지만, 또 다른 복수의 고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엄연히 살아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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