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5 (토)

‘직관’의 참맛에 울화통은 잠들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평소 잘못 인정·사과 인색한 사회에 불쾌감…야구장에선 ‘대반전의 묘미’ 체험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최근 들어 공공장소에서 시비가 붙어 다툼이 벌어지는 일을 자주 목도했다. 누가 보기에도 한쪽의 실수가 분명한데 사과를 하지 않아서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난주 서울 합정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사람들이 미처 내리기도 전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잽싸게 비집고 들어오다가 젊은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젊은 남자는 옆으로 매는 가방에 배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나이 지긋한 남자는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그냥 객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에 격분한 젊은 남자의 육두문자를 나는 지근거리에서 들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젊은 남자가 씩씩거리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 대목에서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출발하는 바람에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는 객차 밖에 있던 나는 모르겠다.

지하철에서든 엘리베이터에서든 내릴 사람이 다 내리길 기다렸다가 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왜 기를 쓰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지. 설령 사정이 있어서 먼저 타더라도 부딪혔으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힐끔 보고 가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싸잡아 얘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일에 참 인색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특히 공공장소에서는 본인의 잘못이 분명해도 상대가 만만해 보이면 대체로 사과하지 않는다. 반면에 영어를 구사하는 나라들을 여행할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임 소리”(I'm sorry. 미안합니다)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아니라 옷깃만 스쳐도 “아임 소리”라고 하더라. 그런 사회적 분위기 같은 건 약간 부러웠다. 심지어 누가 나랑 부딪혔는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사과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대략 삼 년쯤 전인데, 나도 공공장소에서 불쾌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잠실야구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왜 그날 야구장을 찾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혹시 ‘프로야구 시즌권’이라고 아시는지. 시즌권이란 ‘페넌트 레이스’(장기간 겨루는 공식경기)의 모든 홈경기를 지정된 좌석에서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말한다. 가령 엘지 트윈스는 2014년에 128번의 정규 경기 중 64번은 홈경기를, 64번은 원정경기를 치르기로 예정돼 있었다. 시즌권이 있으면 엘지의 홈구장인 잠실에서는 따로 예매할 필요 없이 언제든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물론 비용은 만만치 않다. 프리미엄석, 테이블석, 블루석, 레드석 차례로 가격이 매겨지는데 블루석은 80만원인가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비싼 만큼 선수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니까 표는 금방 매진되어 좀처럼 구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시즌권은 대체 누가 사는 건가. 내 친구가 사더라. 연초에 세웠던 목표가 ‘엘지 트윈스의 모든 홈경기를 직관(직접 가서 관람)하겠다’는 것이었다나 뭐라나. 왜냐고 물으니 그냥 그러고 싶었단다. 세상에는 참 별스런 목표를 세우는 인간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쨌거나 그는 매일 퇴근하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야구장으로 달려갔다. 투수의 방어율이나 타자의 홈런 개수 같은 것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중국 출장이 잡혔던 거다. 출장 명령을 들으며 가장 먼저 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같은 팀을 응원하고 있는데다가 저녁에 별로 할 일도 없어 보였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주에 출장을 가게 됐어. 시즌권이 있는데 놀리면 아깝잖아. 괜찮으면 네가 갈래?”라며 그가 내게 전화했을 때 나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 주 주말, 나는 오래간만에 야구장을 찾았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원고 마감도 당장 끝내야 할 숙제도 전혀 없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바로 코앞에 투수들이 몸을 푸는 불펜이 보였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이쪽을 쳐다볼 것 같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포수가 내는 사인까지 알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들뜬 기분이 되었다. 한데 경기가 시작되자 묘한 일이 벌어졌다. 내 왼쪽에 앉은 자매님은 딱 보기에도 엘지 트윈스의 열혈팬인 듯했는데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해당 선수가 나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니폼을 펄럭이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응원을 해대는 통에 내가 도통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야구장에서의 응원을 누가 뭐라 하겠느냐만 펜스 앞까지 나가서 으?X으?X 하면 시야가 가리니 나로서는 이만저만 답답한 게 아니었다. 타자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옆 관중 시야 가린 무례한 응원에
정중한 항의 거듭해도 ‘아랑곳없어’
분통 폭발 직전 역전 홈런 ‘딱!’
옆 관중 안고 환호…뒤풀이까지


처음에는 이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자매님의 응원은 뜨거워졌다. 나도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5회로 접어들었을 때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저기요, 그쪽이 펜스까지 나가면 제가 보이지가 않아서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반응이 가관이었다. 멀뚱한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사과는커녕 “못 보던 분인데, 여기 아저씨 자리 맞아요?”라며 짜증을 내는 거다. 내가 친구에게 양도받았다고 설명해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둘의 신경전은 엘지와 두산의 경기만큼이나 치열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8회에 엘지의 선두타자가 출루하면서부터는 아예 대놓고 펜스 앞까지 나가서 펄쩍펄쩍 뛰는 게 아닌가. 1 대 3으로 지고 있는 상황이라 답답하던 차였다. 쌍시옷을 동반한 고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두번째 주자가 볼넷으로 출루하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얘기했다. 자매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참내, 원래 야구장 오면 다 이렇게 해요”라며 별 이상한 놈도 다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내 안에 있던 뭔가가 우지끈 부러졌다.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있나. 정중이고 나발이고 울화통이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바로 그때 “딱” 하고 목탁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대타로 출전한 노장 이병규 선수가 상대 투수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친 거다. 타구는 실로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가더니 담장을 넘어갔다. 역전 스리런 홈런이었다. 두산 마무리투수의 등판을 앞두고 패색이 짙던 1루석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다들 펜스 앞까지 나와서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자매님이 나를 향해 손바닥을 번쩍 내밀었을 때 나는 무아몽중의 상태로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하이파이브를 했다. 심지어 자매님이 건네준 이병규 선수의 유니폼까지 들고 목 놓아 응원가를 불렀다니까. 응? 너무 갑작스런 반전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뭐, 이런 게 야구의 묘미 아니겠어. 일면식도 없던 자매님과 경기 후에 맥주를 마시러 간 건 ‘직관’의 묘미일 테고.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 대선 팩트체크] [페이스북] [카카오톡] [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