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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슈탐색] 대선후보 5명인데 수화통역 달랑 1명… "공약 안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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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 참정권 외면한 TV토론회 / 알 권리 제약 받는 240만 장애인 유권자들/“국민으로서 대접받고 있는지 자괴감 들어”/수화 통역사 후보별 배치 등 제도 개선 절실

세계일보

지난 23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한 초청 대상 후보자 토론회의 TV 생중계 모습. 일대일 토론을 하는 후보자 2명의 말을 수화 통역사 한 명이 수화로 전달하고 수화 화면 크기도 작다. KBS1 캡처


서울에 사는 청각 장애인 박화선(51·여)씨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최근 잇따라 열리고 있는 대선 TV 토론을 챙겨 보다가 답답함을 느꼈다. 일대일로 난상토론을 벌이는 후보 2명이 TV 화면에 동시에 나오는데 정확히 어느 후보가 어떤 말을 하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후보들의 말을 전하는 수화 통역사가 단 한 명인 탓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후보 모습이 빠르게 바뀌는 것도 박씨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TV 화면과 수화를 연결하며 어느 후보가 한 말인지 추리하다가 이내 지쳐 버린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음 달 9일 19대 대선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240만 장애인 유권자들은 이 같은 토론회를 비롯한 기본적인 선거 정보에 대한 접근권, 알 권리조차 적지 않은 제약을 받고 있다. 장애인들이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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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토론을 수화 통역으로 생중계한 수화 전문 채널 DPAN.TV의 모습. 후보 2명과 사회자를 담당하는 수화 통역사가 따로 있으며, 수화 화면도 전체 화면의 4분의 1에 달한다. DPAN.TV 캡처


시민 단체인 장애인정보문화누리는 2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방송사들에 선거 TV 토론 한 화면에 수화 통역사를 2명 이상 배치하고 선거 방송 관련 지침을 만드는 등 장애인 차별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단체는 서울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대선 TV 토론에서는 수화 통역사 한 명이 주요 후보 5명의 말을 통역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청각 장애인 유권자들은 토론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해 후보들을 평가하고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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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 장애인들로 꾸려진 단체 한국피플퍼스트가 “후보자들의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만들어달라”며 만든 투표용지 모습(사진 오른쪽). 왼쪽은 지난 대선 때 사용된 투표용지. 한국피플퍼스트 제공


이날 만난 청각 장애인 윤정기(52)씨는 “수화 통역 화면도 너무 작아 수화를 30분만 봐도 눈이 아프다”며 “청각 장애인들이 국민으로서 온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올바른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자괴감과 의구심이 든다”고 호소했다. 윤씨는 후보 5명의 말을 수화 통역사 한 명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연극 대본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우고 대본을 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한국법조인협회 공익인권센터도 이날 선관위와 방송사들을 상대로 대선 TV 토론 관련 청각 장애인에 대한 차별 시정을 요청하는 진정을 인권위에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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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단체인 장애인정보문화누리가 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대선 TV 토론 수화 통역 방식 개선 등 청각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남제현 기자


현행 공직선거법상 TV 토론이나 방송 광고 등에서 수화 통역이나 자막 방송은 의무 사항이 아니다. 수화 화면 크기 등 구체적인 규정도 없다. ‘청각 장애 선거인을 위하여 수화 또는 자막을 방영할 수 있다’고만 돼 있을 뿐이다.

다른 장애인들도 알 권리를 제약 받기는 마찬가지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손효정 기획국장은 “문자를 해독해 정보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발달 장애인들은 선거 공보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또 투표용지가 문자와 숫자로만 돼 있어 원하는 후보를 기억해 찍기 힘들고 후보들 사진 같은 이미지가 들어간 발달 장애인용 투표용지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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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단체인 장애인정보문화누리가 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대선 TV 토론 수화 통역 방식 개선 등 청각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남제현 기자


시각 장애인인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오병철 소장은 “글자로만 A4 한 장 되는 내용을 점자로 만들면 A4 서너 장 정도 된다”며 “이런 이유로 비장애인을 위한 선거 공보에 있는 내용이 점자형 선거 공보에 다 포함되진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선관위에 장애인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만 19세 이상 등록 장애인이 240만760명(전체 등록 장애인의 96.4%)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 대선에서도 장애인 유권자는 240만명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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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등 8개 장애인 단체들은 지난 3일 선관위와의 정책 간담회에서 △점자형 선거 공보 면수 제한 해제 △발달·청각 장애인을 위한 선거 공보 제작 △투표용지에 후보자 사진 병기 △기표소 안에 투표 보조인을 동반할 수 있는 장애 범위 확대 등을 건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건의 사항 대부분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공직선거법상 선거 공보는 비장애인을 위한 책자형과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형으로만 만들 수 있고 선거별로 면수 제한(대선의 경우 16면 이내)이 있다. 또 투표용지에는 후보자의 기호와 소속 정당 명칭, 이름만 표시할 수 있으며, 시각 장애나 신체 장애가 있는 유권자만 기표소 안에 투표 보조인과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선관위는 다양한 의견 청취를 바탕으로 제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점자형 선거 공보는 면수 제한이 있어 일반 선거 공보 내용을 빠짐없이 담기는 어렵다”며 “발달 장애인용 선거 공보 등도 법적 근거가 없어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후보별 수화 통역사 배치 문제는 이번 대선이 끝나고 방송사들과 논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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