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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국립발레단 '허난설헌', 그림같은 '나빌레라'…정중동·동중정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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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막 발레 '허난설헌 - 수월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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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막 발레 '허난설헌 - 수월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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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막 발레 '허난설헌 - 수월경화(水月鏡花)'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허난설헌(1563~1589)이 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의 길고 우아하게 뻗은 양 팔은 시(詩)적이었다.

지난 21일 오후 예술의전당 연습동 국립예술단체 N스튜디오에서 살짝 엿본 국립발레단 신작 '허난설헌 - 수월경화(水月鏡花)'의 전막 리허설은 한폭의 그림 같은 안무로 정중동(靜中動) 또는 동중정(動中靜)의 미학을 뽐냈다.

화선지에 난을 치듯 무대 위에 번지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 똬리를 튼 감정선은 요동쳤다. 특히 감정 연기에 탁월한 박슬기는 연습임에도 남성중심의 가치체계가 완연하던 시기에 섬세한 감각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힘겹게 펼쳐낸 허난설헌에 감정 이입을 해나갔다.

'나빌레라'라는 표현이 적확한 공중으로 비상하는 동작 가운데서도 그녀의 팔과 다리에서 생존하고자 꿈틀대는 근육들은 허난설헌 내면의 안과 밖을 드러내는 듯했다.

반면 여성 무용수 8명이 종횡으로 펼쳐지는 장면은 역동적인 에너지로 뜨거웠는데, 정작 무용수들은 초연했다.

무용수들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침향무, 거문고 연주자 김준영의 거문고 독주 '수장(水漿)' 등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배경음악의 리듬과 멜로디를 솜씨 좋게 타 나갔다.

허난설헌이 남긴 많은 작품 중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 무용화된 작품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잎, 새, 난초, 부용꽃 등이 내내 연상됐다.

발레리나들의 우아한 몸짓이 주축이 됐지만 발레리노들이 방점처럼 움직이거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이 호흡을 맞출 때는 역동적이었다.

제목의 '수월경화'는 '물에 비친 달', '거울에 비친 꽃'이라는 뜻이다. 눈에는 보이나 손으로는 잡을 수 없음을 뜻한다. 시적인 정취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함을 비유하는 사자성어다. 천재적이라 일컬을 만한 글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난 허난설헌의 삶을 이 사자성어에 묻어난다.

무엇보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의 안무작으로 눈길을 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세련된 수묵화 같은 이 55분짜리 2막 발레는,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닮은 강효형의 안무 그리고 그녀가 중요시하는 본능의 감각이 녹아들어갔다.

강효형은 애정이 가득한 눈길로 연습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강수진 예술감독 겸 단장, 연습실 곳곳을 오가며 무용수들을 챙기는 신혜진 지도위원 사이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자신의 첫 번째 전막 안무작인 만큼 긴장한 기색이 살짝 엿보였으나 후배는 물론 선배들에게 정중히 자신의 뜻을 전하는 모습은 프로다웠다.

모던이나 네오클래식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강효형은 2015년 자신의 첫 번째 안무작인 '요동치다'를 'KNB 무브먼트 시리즈1' 무대에 올려 주목 받았다.

이듬해 동일 작품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넥스트 제너레이션'에 초청되기도 했다. 지난해 'KNB 무브먼트 시리즈2' 무대에서 선보인 '빛을 가르다'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는 5월 30~31일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리는 '제26회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이재우와 함께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이 상에서 다른 두 무용수와 달리 '안무가'(Choreographer) 카테고리에 후보로 지명됐다.

강효형은 "첫 안무작인 '요동치다'를 안무할 때만 해도 이런 벅차고 큰 기회가 이토록 빨리 찾아오게 될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며 "사실 처음 강수진 단장님께 작품을 의뢰받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내겐 꿈 같은 일이라 지금도 가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웃었다.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것에 대해 부담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처음 안무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작업은 자신에게 반드시 즐기고 행복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수긍했다.

"그래서 작품을 안무할 때 따르는 부담, 심적 압박들조차도 편안하게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어요. 몸도 마음도 정신없이 지치고 고되지만 매순간 너무 흥분되고 즐거워서 전혀 힘들지 않죠. 안무를 하는 순간에는 내 온몸에 엔도르핀이 넘쳐흐르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허난설헌은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와 자신을 평생 외롭게 한 남편, 몰락하는 친정, 일찍 떠나보낸 두 아이에 대한 슬픔으로 점차 쇠약해지다 시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런 가혹한 그녀의 삶 속에서 탄생한 허난설헌의 시들은 천재성이 돋보였다. 하지만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 탓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중국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허난설헌 - 수월경화' 역시 강효형을 비롯해 여성 예술가들이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강수진 예술감독을 비롯해 의상에 정윤민 디자이너, 무대 디자인에 박연주 디자이너 그리고 허난설헌 역의 박슬기와 신승원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촉망 받는 여성들이다.

강효형은 "아무래도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봉건시대 사회에 얽매여 자신의 천재성을 발하지 못하고 쓸쓸히 살다 스러진 허난설헌의 삶에 대해 더욱 깊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난설헌의 세계를 더 십분 이해하고 더욱 절절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여성들로 이루어진 이 크루가 당연히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어요. 여성만의 매력이나 여성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느낌 등으로 안무에 강조를 주는 것은 당연히 있죠."

자신이 여성이라 "여성의 감성을 더욱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다거나 여성의 몸을 더욱 잘 이해하기 때문에 무용수의 몸을 더욱 아름답고 매력 있게 보일 수 있도록 안무한다거나 하는데서 차별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난설헌은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성적인 여인이다. 강효형은 그녀의 시만 읽어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진 일들. 자신을 외롭게 한 남편, 일찍 보내버린 자식들에 대한 찢지는 고통, 몰락해버린 친정…. 이 상황을 알고 '몽유광상산'을 읽는 다면 이 시또한 처절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어요."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몽유광상산' 중) 부용꽃이 지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허난설헌. '몽유광상산'의 이 마지막 구절을 안무로 옮기면서 함께 녹여낸 허난설헌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 그녀 또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녀가 이 마지막 시를 쓰면서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어요. 허난설헌의 직접적인 감정보다는 제가 허난설헌의 삶에 대해 감정을 이입해 읽었던 감우나 몽유광상산에서 느낀 나 자신의 감정이 이 작품에서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이 구절에서 느꼈던 처절한 느낌이 곧 허난설헌의 감정이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허난설헌 - 수월경화' 오는 5월 5~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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