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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사설] "北 인권案에 기권한 게 뭐 잘못이냐"는 진보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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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 표결 때 북에 물어보고 기권했다는 문제의 사실관계는 거의 드러났다. 기권하기로 1차 결정했다가 외교부 장관이 찬성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하자 북의 입장을 물어보는 전통문을 보냈고, 북의 반발이 확인된 뒤에 기권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 측은 이것은 북에 물어보고 기권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쪽은 물어보고 기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판단은 유권자들이 하면 된다.

그런데 이 논란 과정에서 드러난 일각의 인식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 후보의 대선 후보 TV 토론 단장을 맡고 있는 진성준 전 의원은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한 입장을 북한 당국에 물어보았다 쳐도 그게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TV 토론에서 "제가 만약 당시 대통령이었다면 기권 결정을 했을 것"이라며 "남북이 평화로 가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 기회를 살리는 정무적 판단을 중심에 두는게 당연하다"고 했다. 이것이 한국의 진보 진영이 북한 주민 인권에 대해 가진 기본 인식일 것이다.

우리 진보 진영은 국내의 인권 문제에 대해선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적극적인 반면 주민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북한 정권의 만행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무관심하다. 유엔이 매년 북한 인권 결의안을 내고 표결로 통과시키는 것은 이 야만적 정권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인류 차원의 고발이다. 이 문제를 놓고 심 후보 말대로 '정무(政務)적' 판단을 한다면 그 '정무'는 대체 무엇인가. 국제사회는 제 동포 인권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눈치 보고 흥정하는 무원칙한 나라를 존중하지 않는다. 진보 진영은 남북 관계가 잘되는 게 북한 인권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북 관계가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 기간에 김정일은 핵폭탄을 만들고 핵실험까지 했다. 북의 전략·전술에 기만당해 5000만 국민을 핵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고도 '햇볕'과 같은 동화(童話)적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싫어하는 일을 안 하면 남북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은 병을 치료하지 않고 진통제만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 것과 같다. 당장 입에 써도 약을 먹어야 병을 고친다. 우리가 유엔이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하기 시작한 2003년부터 일관되게 찬성했으면 이제 북은 인권에 관한 한 남한 진보 정권에도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핵, 인권과 같이 북이 싫어하더라도 남북이 논의해야만 하는 주제를 의제로 만들기 위해선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고 견디며 일관되게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5년간 북 인권안 표결에서 불참→기권→기권→찬성→기권 기록을 남겼다. 찬성한 2006년은 북이 핵실험 도발을 해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눈치, 국제사회 눈치를 보면서 왔다 갔다 하고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북에 물어보고 기권한 게 무슨 문제냐'고 하는 것이다. 유엔은 북한 인권 상황이 심각해지자 북한 인권 조사위원회(COI)를 만들어 2014년 반인륜(反人倫) 범죄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안보리가 북한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고, 인권 침해 책임자(김정은) 제재를 검토하라고 촉구하는 결의를 총회에서 채택했다. 우리 진보 진영은 반대로 가고 있다. 2005년 상정된 북한인권법을 11년간이나 막고 있다가 누더기로 만들어 지난해에야 통과시켰다. 문 후보는 이 표결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민주당은 그 법에 따른 북한 인권재단 출범도 사실상 막고 있다.

이런 진보 진영이 집권이 유력한 상황이다. 국제사회는 차기 정권이 북한 주민 인권 문제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할 것이다. 문 후보로부터는 북한 인권 결의안에 조건 없이 찬성하겠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만약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한반도 정세가 유화적으로 바뀔 경우 또다시 북한 반응을 의식하면서 '찬성'과 '기권'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있다. 북의 나쁜 버릇은 굳어질 것이고 국제사회는 남북을 모두 이상한 사람들로 보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로부터 지지와 존중을 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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