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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지평선] 국가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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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30여년 전에 국시(國是) 논쟁이 있었다. 1986년 10월 제12대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이 “반공을 국시로 하면 88올림픽에 동구 공산권 국가가 참가하겠느냐.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국회의원이 원내 발언으로 회기 중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민주정의당 등 의원 147명이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우리의 국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반 국가단체의 노선과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 국시는 사전적 의미로 국민 지지도가 높은 국가 이념이나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이다. 학계 등에서는 “국시가 반공이면 공산주의가 사라지면 국시도 없어지는 것이냐”라는 논리로 응수했지만, 국시를 통일로 하더라도 통일이 되면 국시는 사라질 운명이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구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된 지금에 와서 보면 국시는 반공이나 통일보다는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어울리지만,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결국 유 의원은 1992년 대법원에서 면책특권 취지로 공소 기각이 확정됐다.

▦ 강성학은 저서 ‘한국의 지정학과 링컨의 리더십’에서 반공 과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고 평화를 보장받기 위한 유일한 최선의 방법은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가의 적이었고 공산주의 정권은 악으로 여겨졌다. 무차별적인 반공 투쟁은 국가의 책무가 됐다.” 3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적(主敵) 논쟁이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 논란도 국시 논쟁과 닮은 점이 없지 않다.

▦ 국시, 주적 논쟁 등은 국가 정체성 문제로 귀결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정체성 논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경제 분야의 급격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ㆍ안보 분야에서는 북한이라는 변수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런데도 안보공약은 간데없고 색깔론만 판을 친다. 시대가 변하면 개헌이 필요하듯 국가 정체성도 변화할 수 있다. 후보들이 해묵은 정체성 논란에 집착하면 정작 중요한 공약들이 파묻힌다. 국민은 진정으로 북핵을 통제하고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는 안보공약을 기대한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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