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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NGO 발언대]성폭력 피해자에게 강요된 용서와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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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어난 섬마을 학부형과 주민에 의한 성폭력 사건 항소심 판결이 최근 있었다. 학부형과 주민 등 3인이 공모해 자녀가 다니는 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다. 가해자들은 1심에서 징역 18년, 13년, 1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런데 항소심은 가해자들에게 각각 징역 10년, 8년, 7년을 선고했다. 형량이 거의 반토막 난 것이다.

경향신문

항소심에서 이들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이유는 피해자가 ‘합의’를 했고 선처를 바랐기 때문이란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형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지만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는 위험한 논리다.

한동안 나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성폭력 사건을 고소하면 대체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이 있다. 가해자 측의 합의를 위한 거침없는 질주다. 이때 주로 등장하는 사람은 가해자의 엄마나 아내, 누이다. 이들의 출현은 때와 장소,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피해자는 아이의 미래와 가족의 생존을 걱정하는 가해자 아내나 노모의 처절한 호소와 눈물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호소와 눈물을 외면하면 냉혈한이라 비난받는 것은 물론 그들이 쏟아낸 처절한 서사 때문에 피해자 자신도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한다. 더구나 대다수 성폭력은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진다. 그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연결된 공동체 안에서 유통되는 무수한 말들과 공기가 만들어내는 압력은 정말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피해자는 합의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는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이다. 물론 이 과정은 가해자의 엄마, 아내에게도 고통의 시간이다.

나는 섬마을 피해교사의 합의와 선처 요구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뤄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표면적으로는 합의지만 실상은 ‘강요된 용서’다. 피해자를 이런 끔찍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은 옳지 않다. 애초에 합의가 가해자의 형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판결문에 ‘합의했기 때문에’라는 문구가 등장하는 한 ‘강요된 합의와 용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 합의는 ‘꽃뱀’이라는 비난과 연결된다. 엄청난 압박 때문에 합의를 선택했음에도 ‘돈’을 받는 순간 피해자는 꽃뱀이 된다. 피해자는 어떤 선택을 해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은 가해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책무다. 이 당연한 책무가 가해자에게는 잘못을 경감해주는 도구가 되고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비난의 이유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

합의가 감경 사유가 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합의는 돈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죄 방법이다. 말 그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최근에는 성폭력 가해자들이 형량 감경을 위해 변호사들의 조언에 따라 여성단체나 성폭력 관련 기관에 기부금을 내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갑자기 고액을 입금하고 연말정산 시기가 아님에도 기부금 영수증을 요청한 사례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법원에서 이 영수증이 효력을 발휘한단다. 가해자들은 돈으로 일종의 ‘죄 사함’을 사고 법원은 이를 묵인하는 것이다.

현재 합의 시도 중 피해를 야기하면 형을 가중한다는 기준은 있다. 그러나 합의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조건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다. 합의 양형고려는 적폐다.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과와 용서, 피해 회복, 성폭력범죄 근절로 나아갈 수 있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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