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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모든 사람에게 敬語… 軍서 부하들에게도 써 애먹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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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가 걸어온 길]

왜 경어 쓰느냐고 묻자 "어머니가 평생 내게 존댓말 써"

의사→IT사업가→교수→정치인… 한때 교과서 11곳에 등장하기도

'양보의 아이콘' 이미지 벗고 "두 번 다시 양보는 없다" 각오

안철수(56) 국민의당 후보는 "두 번 다시 양보는 없다"고 했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2012년 대선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했던 때와 각오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91년 군의관(해군 대위) 임관식 때 모친 박귀남 여사와 함께. /안철수 캠프


안 후보는 1962년 2월 26일 부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안 후보는 "나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집중력이 좋았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과학자가 꿈이었다.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말에 메추리알을 품고 잠든 적도 있다. 아버지 권유로 의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애플 컴퓨터를 갖고 있던 친구와 살면서 컴퓨터를 독학으로 배웠다. 난생처음 돈을 빌린 것도 새로 나온 IBM 컴퓨터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해 무료로 보급했다.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의학 컴퓨터'라는 과목을 만들기도 했다. 군대는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제대 직후 1995년 의사를 그만두고 '안철수연구소(현 안랩)'를 설립했다. 하지만 초기 회사 운영은 적자였다. 당시 소원이 한 달만이라도 월급 걱정을 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안 후보는 그때를 회상하며 "어음 깡(할인)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정치하면 곤란한 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1997년에는 미국 실리콘밸리 한 회사가 "1000만달러에 회사를 팔라"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안 후보는 "같이 고생한 직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회사는 승승장구했고 회사를 세운 지 10년째 되던 해 CEO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 유학을 떠났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과정에 10대1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아내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와는 의대 본과 2학년 시절 만나 석사과정을 마친 뒤 결혼해 딸 설희씨를 낳았다. 맨 처음 "내가 친구해줄까요?"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부인 고향이 전남 여수라서 자신을 '호남의 사위'로 불러달라고 한다. 안 후보는 지금도 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경어(敬語)를 쓰는데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나에게 평생 존댓말을 썼다"고 했다. 군대에서도 부하들에게 경어를 사용해 애를 먹었다.

유학 후 2008년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2011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명세를 타면서 안 후보는 '가장 닮고 싶은 시대적 멘토'로 부상했다. 그의 '청춘 콘서트'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과 '멘토' 문화의 원조 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초중고 교과서 11곳에 그와 관련된 글이 실렸는데, 이 문제는 안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현존 인물의 교과서 등재에 대한 논란으로 번졌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는 본격적으로 정치권에서 이름이 오르내렸다. 새정치를 의미하는 '안철수 현상' '안풍(安風)' 등의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50% 넘는 지지를 받았던 안 후보는 당시 5% 무소속 후보였던 박원순 서울시장 손을 들어줬다. 그해 11월에는 1500억원 상당 안랩 소유 주식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2012년 9월 19일, 정치 개혁을 앞세워 대선 출마 선언을 했지만 "싸우는 건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며 후보직을 사퇴하고 문재인 후보 손을 들어줬다. '양보의 아이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독자 세력화를 추진하다 2014년 3월 민주당과 합당했다.

정당 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당대표로 추대됐지만 지방선거, 재·보궐선거에 실패하며 4개월 만에 사퇴했다. 문재인 후보 및 친문 세력과 '혁신'을 놓고 대립하다 2015년 12월 탈당했다. 주변에선 '설마'했지만 그는 "허허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나선다"며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작년 4월 총선에서 호남을 중심으로 '녹색바람'을 일으키며 38석을 얻어 '다당 구도'라는 정치 변화를 이끌었다.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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