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개인정보보호에 꽉 막힌 빅데이터 산업…걸음마도 못떼는 한국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D-CHECKING 코리아 ① ◆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5년 2월 5일, 강은희 당시 새누리당 의원(현 여성가족부 장관)은 동료 국회의원 20명과 함께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을 냈다.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에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 관련 규정을 한곳에 모아 법 체계를 단일화하고, 3개 법이 상충하거나 이중으로 규제하고 있는 부분을 없애는 법안이었다.

'빅데이터' 활용을 유연하게 만드는 조항도 삽입했다. 통계나 연구, 시장조사, 마케팅 등이 목적이라면 비식별화 조치를 조건으로 정보 주체 동의 없이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상임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3개 법의 소관 부처인 행정자치부 방송통신위원회 금융위원회가 일제히 반대 의견을 냈다. "실행 가능성은 물론 합의가 될지도 알 수 없는 법" "통합 개인정보보호법을 3개 부처가 나눠 맡아 관리하면 해당 조항의 주관 부처가 어디인지도 헷갈릴 것" 등의 이유가 쏟아졌다.

해당 법 개정 작업을 자문했던 김경환 법무법인 민후 대표변호사는 "이 법만 국회를 통과했어도 지금 빅데이터 수집 발목을 잡는 관련 규제들이 굉장히 줄어들었을 것"이라며 "작년 6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이 나오면서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빅데이터를 산업적으로 육성하기에는 규제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의 키는 빅데이터다. 클라우드컴퓨팅,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등 기반기술의 원천 정보가 빅데이터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를 가공·응용하기는커녕 생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곳저곳에 산재한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개인정보 분야가 대표적이다. 잦은 유출 사고 때문인지 관련 법들은 '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업적 활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3개 법이 제각각 규제한다. 온라인상의 개인정보는 정보통신망법을 적용 받는다. 신용거래 시 개인정보는 신용정보법에 따른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 전반에 대한 사항을 다룬다. 개인정보를 포함한 빅데이터를 생산해 사업을 벌이려고 해도 정보 주체의 명시적 동의가 없으면 거기에서 가로막힌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미국의 규제 체계는 우리와 정반대다. 허용되지 않는 몇 가지를 열거하고, 자유롭게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사후에 허가를 받는 네거티브 시스템이다. 미국은 정부가 나서 빅데이터를 제공하기도 한다. 2015년 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정밀의료계획(the Precision Medicine Initiative)'을 발표했다. 이때 의사, 제약사, 연구인력 등에 비식별 조치를 거친 환자 100만명의 유전자, 식습관, 운동량, 진료기록 정보를 연구 목적으로 허용했다.

매일경제

중국도 민관이 앞다퉈 빅데이터 산업을 키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13차 5개년 계획(2016~2020년)에서 빅데이터를 집중 육성 대상으로 지정하고 국무원, 공업신식화부, 재정부 등을 중심으로 기반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

민간에서도 적극적이다. 기후사(Climate Corporation)는 날씨·기후 변화에 따른 농업보험 수요를 예측하는 데 빅데이터를 이용한다. 250만개 지점에서 측정한 기후 자료와 실시간 예측 시스템, 1500억개에 이르는 토양 관찰 데이터를 수집·가공해 활용한다.

한국은 4차 산업혁명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자리 잡은 후에야 겨우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배포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가이드라인은 행정 규칙에 불과해 법적 구속력이 없고, 개인정보를 넘긴 자에게 지나친 사후관리 책임을 묻고 있다.

전승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34·변호사시험 3회) 등 3명의 연구진은 지난해 12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의 법률적 의미와 쟁점'이라는 논문에서 "비식별화 개념을 구체적으로 법에서 정의해야 한다"면서 "비식별 정보에 대해 과도하게 높은 수준의 사후관리 의무를 부과할 경우 데이터 분석 결과의 교류 자체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해 상업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개인정보를 악용한 범죄는 최고 수준의 형벌로 다스려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더불어 규제 체계도 네거티브 형태로 바꿔야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무난히 넘을 수 있다는 의견이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2012년 화장품에 사용 가능한 원료 목록을 없애고 배합 금지 원료를 지정하는 형태로 관련 법을 개정했더니 생산금액이 27% 증가했다"며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규제만 네거티브 형식으로 전환한 효과가 이 정도다. 전반적인 규제 시스템을 서둘러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 노원명 논설위원(팀장) / 박용범 차장 / 김세웅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