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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이해하고 사랑하고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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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로베르트 발저 중단편집 <산책자>

한겨레21

“로베르트 발저는 산문의 파울 클레.” 수전 손택의 말이다. 현대 추상회화의 거장 파울 클레와 20세기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가 중 한 명인 로베르트 발저. 스위스 출신이란 공통점 외에 이 둘은 꽤 닮은 인상을 풍긴다. 자유롭고자 하는 강박에서 자유로운. 얽매이지 않으려는 고집에 얽매이지 않는.

로베르트 발저(1878~1956)의 <산책자>(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에는 중단편 42편이 담겼다. 클레는 아이가 그린 듯 동화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선과 색으로 다단한 감정을 불러들이는데, 발저 역시 평범한 이야깃거리로 사조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썼다. 예술을 수프 타입과 샐러드 타입으로 나눠도 된다면, 발저는 후자다. 삶의 다양한 표정을 뜨거운 정념으로 끓이고 녹이는 대신 그는 냉소와 유머, 환멸과 환희, 비관과 풍자, 혹독과 매혹을 샐러드처럼 버무린다. 발저를 만나면 서늘할수록 신선하게 느껴지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산책’은 발저 작품의 중요한 연료였다. 정규교육을 다 받지 못한 발저는 하인, 공장 노동자, 사무보조 등을 전전했고 작가가 된 뒤에도 ‘지식인’ 집단에서 배제된 채 20년 넘게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에겐 ‘걷기’와 ‘쓰기’만 남았던 듯하다. 산책길에서 삐져나온 발저의 소설은 대부분 짧고(두 쪽짜리도 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붐빈다. “나는 가장 작고 허름한 것만을 주시했다. 지극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늘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349쪽)

책을 번역한 소설가 배수아는 발저를 이렇게 표현한다. “작가 자신도 다음 문장의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미리 계산하고 있지 않다는, 우아하고 유쾌한 자포자기의 즉흥 댄스와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까지 성공한다.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 ‘로베르트 발저’라는 제목의 에세이(1929)를 남기기도 한 발터 베냐민이 파울 클레의 한 그림에 대해 쓴 글은 발저를 성큼 떠올리게 한다.

“천사는 마치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는 듯 그려져 있다. (정면을 보는)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 천사는 머무르고 싶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또한 산산이 부서진 파편들을 모아 다시 짜맞추고 싶다. 하지만 폭풍이 천사가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불어와 그 천사는 날개를 옴짝달싹할 수도 없다. 천사 앞에 놓인 파편 더미가 하늘로 치솟는 동안, 이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으로 향하여 막무가내로 그를 떠밀고 있다. 이 폭풍이 바로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이다.”(<역사철학 테제 9>) 이 그림의 제목은 ‘새로운 천사’다.

사후인 1970년대에 새로 조명받아 스위스 ‘국민 작가’가 된 발저의 편지.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74쪽) 일찌감치 발저에 매혹된 헤르만 헤세의 고백. “그가 수십만의 독자를 가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진보한) 곳이 될 것이다.”

석진희 <한겨레> 디지털뉴스팀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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