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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보드카 병을 왜 90도 옆으로 슬쩍 돌려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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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모호함 자극해 참여 유발, 판매량 급증… 꼴찌에서 1위로

현대인은 분명한 답변 원하지만 불확실성 견뎌야 4차혁명 승산

조선일보

난센스(Nonsense)

제이미 홈스 지음ㅣ구계원 옮김
문학동네 | 404쪽ㅣ1만6800원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는 이번 주 본지 인터뷰에서 '감정 지능'(Emotional Intelligence)과 '마음 균형'(Mental Balance)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AI(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하는 사피엔스의 자세, 즉 우리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뭐가 바뀔지 알 수 없는 미래에는, 평정심과 유연성 교육이 필수과목이라는 얘기였다.

제이미 홈스(Homles)의 '난센스'는 하라리 교수의 추상적 화두에 대한 구체적 응답 중 하나다. 그는 컬럼비아대 국제정책대학원 출신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는 미국 싱크탱크 '뉴아메리카'의 현직 연구원. '난센스'의 부제는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는 법'이다. 사례의 백화점식 나열이라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장점은 수많은 사례에 있다.

'난센스'의 사전적 의미가 혼란스럽고 불편한 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의학적 난센스 사례부터. 2011년 확인된 MRI 검사에서, 미 프로야구(MLB) 투수 31명 중 27명의 어깨가 비정상이라는 결과가 확인되었다. 어깨 연골 상태가 일반인의 정상 분포와 달랐던 것. 함정은 이 투수들이 모두 싱싱하게 던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검사만 실시하면 민감한 경고등이 켜졌다. 운행 중에는 한 번도 문제가 된 적 없지만, 툭하면 '엔진 경고등'이 켜지는 일부 자동차처럼. 그렇다면 이 투수들은 어깨 수술을 받아야 할까? 감독과 궁합이 맞지 않아 쉬고 싶으면, 투수들은 MRI 결과를 구단에 제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게 홈스의 유머다.

'종결 욕구'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다. 혼란과 모호성을 두려워하며, 명쾌한 답변을 원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이번에는 '종결 욕구'가 빚은 참사의 사례. 2004년 뉴욕의 52세 여성 토리는 림프종 관련 희귀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연말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웠던 토리는 다른 병원에서 CT 촬영을 했고, 이번에는 암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화가 난 토리가 첫 번째 의사를 찾아가 따졌지만, 그는 식은땀과 얼굴 홍조로 볼 때 림프종의 전형적 증상이라고 단언했다. 갱년기 여성들은 대부분 식은땀이 나고, 얼굴도 붉어진다는 토리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러 해의 병원 전전 끝에, 토리는 암이 아니라는 최종 확정을 받았다. 토리는 이제 암환자가 아니지만, 울지 말아야 할 상황에 울거나,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상황에 화를 내는 사람이 됐다. 일종의 후유증이자 신경장애다.

불확실성과 모호성에 관대하지 않은 의료계 문화가 빚어낸 재앙. 실제로 환자의 몸 상태는 확언하기 어렵기 마련이지만, 불확실성은 늘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의사를 난처하게 만든다.

조선일보

간단한 퍼즐이나 게임을 만들어 독자를 몰입시키면, 독자들은 뿌듯함을 느끼고 참여한다. 보드카 앱솔루트 광고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오히려 성공으로 이끈 예외적 사례. 후광을 만들어 병을 천사로 만든 뒤 ‘완벽’(Absolut Perfection)이라 쓰거나, 나비넥타이 맨 보드카 병에 ‘블랙타이(Black Tie)’라 쓰는 대신 ‘우아(Elegance)’라 쓰는 식이다. 90도 돌려 놓은 병에는 ‘옆모습’(Profile)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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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가. 이번에는 성공 사례로 조명을 돌려 보자. 지금은 이름만으로도 익숙한 브랜드지만, 앱솔루트는 1979년 미국 보드카 업계 판매 최하위였다. 1년 내내 5000상자. 하지만 10년 후인 1989년에는 500배 증가한 250만 상자, 독보적 1위였다. 수집가와 팬덤까지 양산했던 당시 앱솔루트 지면 광고의 특징이 '불확실성'과 '모호함'이었다. 지금에야 '전설'로 숭배하지만, 당시만 해도 독자와 소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광고였다는 것. 가령 술병이 나비넥타이를 매고(Absolut Elegance), 술병 정면이 아니라 90도 회전해 옆면을 보여주거나(Absolut Profile), 빈 마티니 잔 두 개를 옆에 배치하는 식(Absolut Dream)이다. 어떤 메시지도 1~2초 정도 걸려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성공 비결은 빨랫줄 직구 같은 종결욕구가 아니라, 궤적 불확실한 커브의 모호함에 있었다는 게 홈스의 분석이다.

현대인은 기계적으로 간극을 메우고 불일치를 해결하려 한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 세부 사항 하나하나를 모두 챙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일반화를 할 수밖에 없고, 원하지 않아도 이제는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한다. 소위 '단순화의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이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견뎌내는 능력, 혹은 활용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게 홈스의 주장이다.

끝없는 심사숙고를 피하거나 차단하는 인간의 선택은 어쩌면 자연선택의 산물일 것이다. 그 본능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 4차 산업혁명과 AI 시대를 대비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 역시 명쾌한 해결 방법을 주는 것은 아니다. 홈스와 홈스의 책 '난센스' 역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부산물이므로.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칼에 베는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쓸모를 바꾸는 맥가이버의 칼이라는 것.

[어수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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