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30 (화)

[사유와 성찰]하와는 퇴장, 마리아는 등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어쩌다 생겨나서, 실없이 살다가, 시시하게 끝나는 게 인생”이라고 하면 서운할 게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경전들은 우리 삶의 허무한 실상을 애써 감추거나 적당하게 감싸지 않는다. 너나 나나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보서)이라고. 아침에 피어서 푸르렀다가 저녁이면 시들고 말라 버리는 신세이니 아무리 잘났어도 자랑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아침마다 남의 손을 빌려 머리를 말아 올리느라 바쁜 저 팽팽하고 화사한 얼굴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삶도 결국은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풀꽃”(베드로1서)에 지나지 않는다. 가만히 읊어보라.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천년을 다 살아보지 않아도 누천년 역시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리라는 짐작은 누구나 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짧디 짧은 금생을 어찌 살아야 하겠는가.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죽은 가지들을 솎아낸 지는 좀 되었다. 너는 이 봄을 누리지 못하는구나, 하고 인사를 잊지 않았다는 농부를 만났다. 우리에게도 먼 길 떠나는 날이 없지 않으니 그 정도 인사는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권력을 쥐고 으스대던 자, 금력을 가지고 뽐내던 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거나 감옥행을 기다리고 있다. 대대적인 민폐와 끔찍한 불행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그들이지만 다음 생에서는 새롭게 만나기를 빈다. 어디서든 되도록 오래오래 “어쩌다 생겨나서/ 실없이 살다가/ 시시하게 끝내버린 삶”을 돌아보며 가슴 치길 바란다.

한편 성경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서는 거듭 탄식하면서도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가엾은 연민과 존중을 드러내고 있다. 흙에서 왔으므로 먼지로 돌아갈 존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느님은 사람을 금지옥엽으로 대하신다는 말씀인데 사람이 정말 귀할까? 창세기는 하느님이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일을 근거로 들며 그렇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라는 표현은 사람의 겉모습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보면 신의 형상은 신 자신을 가리키고, “신과 비슷하게”란 생명의 근원인 신의 피를 가졌다는 의미이다. 고로 사람은 조만간 부스러질 진흙이 아니라, 하느님의 살아 있는 얼굴이어야 한다. “사람은 사람 그 이상”이라는 게 모든 경전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를 망령된 사상이라며 구박할 자는 없겠으나 천민(天民)을 천민(賤民)으로, 인내천(人乃天)을 인내천(人乃賤)으로 알아듣는 자가 적지 않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도,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설 때마다 어른들은 더 많이 쫓겨났고, 아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인간의 탄생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오늘이 예수가 어머니 배 속에 점지된 바로 그 날이란다. 태어난 날이 12월25일이니 열 달을 되짚으면 3월25일이 된다. 많은 화가들이 성경이 전해준 그날의 풍경을 그렸다.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영보(聖母領報)’가 대표적이다. 천사가 아기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하자 마리아는 어렵게 수락한다. 왼쪽 상단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가 처녀의 가슴을 비춘다. 그 빛 가운데로 비둘기가 내려오는데 신령한 기운에 의해서 아기의 잉태가 가능했다는 점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줄 위에는 또 다른 새, 제비가 앉아 있다. 제비 한 마리를 보고 봄날의 도래를 아는 것처럼 한 인간의 탄생을 보면서 이제 구원의 새날이 밝아왔음을 알아차리라는 재촉인 셈이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성모영보가 있었던 그날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쫓겨난 바로 그날로 보았다. 그런 이유로 그림 속에 그들도 나온다. 그림 왼편, 꽃과 나무가 만발한 정원에는 첫 남자와 여자가 죄를 짓고 동산 밖으로 쫓겨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성모영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한 사람 덕분에 구원이 왔다는 사실을 전하노니 시름 걷고 환한 마음과 넘치는 생기를 되찾으라는 복된 격려였다.

죄 많은 이가 권좌에서 내려오자 천 날 넘도록 물속에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갑자기 떠올랐다. 마치 언 땅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보낼 자들은 멀리 떠나보내고 천지에 돋아나는 아이들을 맞이하며 손들어 인사하자. “어서 오라고. 잘 왔다고. 같이 살아보자고. 비바람 가뭄 뙤약볕을 함께 겪으면서 지내보자고.”(이철수)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