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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여적]사라진 공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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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용타(乙容打)’라는 신조어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과 위키백과에도 등장한다. 2003년 12월7일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중전에서 유래됐다. 한국이 1-0으로 앞서던 전반 14분 중국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오른쪽 발목을 강하게 걷어찼다. 고질적인 발목부상에 시달리고 있던 이을용 선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중국 선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머리를 감싸쥐고 엄살을 피우며 누워 있는 중국 선수와, 이 모습을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내려보는 이을용…. 과도한 태클을 뒤통수 때리기로 시원하게 응징하는 이 장면에 ‘을용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을용타’ 단어 속에는 공한증(恐韓症)에 시달리던 중국축구에 대한 한국의 우월의식이 배어 있다. 실력이 모자라니 거친 플레이를 일삼는 중국 축구를 응징하는 ‘사이다 한국축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의 ‘공한증’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부터 시작됐다. 경기 시작 불과 9분 만에 3골을 헌납하면서 비로소 고질병임을 인식하게 됐다. 별의별 분석도 있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이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샤오황디(小皇帝)를 양산하면서 단체종목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2010년 2월10일 견고하던 공한증의 일각이 무너진다. 동아시안컵에서 중국이 한국을 3-0으로 완파한 것이다. 첫 승리였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래도 한국 측의 반응은 이랬다. ‘을용타를 유발하는 소림축구가 별 수 있겠는가’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았겠지.’ 지난해 9월 러시아월드컵 예선 홈경기에서 중국을 3-2로 꺾자 ‘아직 중국은 안돼’ 하는 방심이 지배했다. 그러나 먼저 3골을 넣고도 내리 2골을 실점한 그 찜찜한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6개월 만에 벌어진 지난 23일 원정경기에서는 0-1로 패했다. 한 번은 방심이라 쳐도, 두번째는 실력이 아닐까.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이미 ‘월드컵 본선진출과 중국 월드컵 개최, 월드컵 우승’을 3대 소원이라 꼽았다. 이 야심찬 목표의 첫번째 걸림돌이던 그 지긋지긋한 공한증을 이제야 날려버린 것이다. 야구 하면 미국이 아닌가. 시진핑 주석은 아마도 ‘축구 하면 중국’을 외치고 싶은 것일 게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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