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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연평초령의모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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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 들어가며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을 15회(격주) 연재한다. 글쓴이 신상웅은 196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쪽을 길러 염색을 하고 무늬를 넣은 화포를 만든다. 2016년 서울과 청주에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동아시아 쪽빛의 현장을 찾아 떠난 책 <쪽빛으로 난 길>(마음산책)을 펴냈다. 몇 년째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에 관련된 나라와 지역을 찾아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편집자주



오랜 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고 뛰어난 예술성을 뽐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 눈엔 다른 어느 그림보다도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그림은 짧은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도 있다. 그림이 가진 마술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 한 점이 바로 그런 경우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 <북학의>(北學議)를 쓴 바로 그 사람, 박제가가 그렸다는 이 그림의 제목은 <연평초령의모도>(延平髫齡依母圖·이하 의모도)다. ‘어린 연평이 엄마에게 의지해서 살다’ 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연평’은 정성공이라는 좀 특별한 인물을 부르는 여러 호칭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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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초령의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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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렸다는 그림 몇 점이 지금도 전해진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취미나 심심풀이로 붓을 잡았던 당시 문인들의 흔한 그림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고기나 꿩을 그렸고 소를 탄 목동과 별 특징 없는 산수화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전문분야는 글이지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모도>는 좀 달라 보였다.

20년이 더 지났어도 이 그림을 처음 만나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흑백의 흐릿한 도판이었지만 박제가의 그림 <의모도>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그림이었다. 그림 위에 박제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한국회화사에서는 보기 드문 이채로운 형식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의모도>는 서양의 원근법이 조선 화단에 처음 도입된 사례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던 박제가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시대를 앞서간 그림. 그럴듯했다.

이전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서양풍의 그림이었지만 나는 스타일의 차이만이 아니라 작가인 박제가에게 더 눈이 쏠렸다. 이상했다. 그의 이름이 분명한데도 나는 그가 그렸다는 사실에 얼마간 의심이 일었다. 당장 확실한 증거를 내밀 수는 없었지만 내 눈엔 일반적인 문인의 솜씨가 아닌, 오랜 기간 훈련을 거친 전문화가의 붓질이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대상을 그리는 기법뿐만이 아니었다. 화면을 지배하는 분위기도 그랬다. 하나의 그림 안에 이질적인 무엇이 섞여 있었다. 그가 썼다는 화제의 내용도 또 다른 의문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나라 말엽에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가들어 아들 성공을 낳았다. 지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성공은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 우리나라 최씨(崔氏)가 예술로 일본에서 노닐다가 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초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제 최씨는 없고 그 초고가 내 선생님 댁에 남아 있어 이를 보고 그렸다. 붉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은 사람은 지룡의 처인 일본인 종녀(宗女)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칼을 차고 놀고 있는 아이가 성공이다. 박제가 그리고 적는다.’

그림의 주인공 정성공(鄭成功, 1624~62)은 쓰러지기 직전의 명나라 황실을 일으켜 세우고자 만주족인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 남쪽 해안을 근거지로 싸우다가 결국 청의 군대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나고 그곳에서 죽는다. 그러니까 당시 청의 입장에서 보면 정성공은 자신들에게 무력으로 저항하던 골칫거리이자 적대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셈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인물을 소재로 박제가가 그림을 그린 것일까. 당시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가 가장 융성하던 시기였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이를 배워야 한다고 누구보다 앞서서 주장했던 사람이 박제가였다. 그 탓에 욕도 먹고 손가락질도 당했다. 오랑캐를 배우라니. 그런 박제가가 정성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마땅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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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1750~1805).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로 4차례 중국을 다녀왔고 <북학의>(1778·정조2년)로 유명하다. 그는 ‘중국을 배우자’고 주장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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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의모도>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지만 원화를 볼 방법도 없었고 그림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찾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조선에 도입된 최초의 서양화풍의 그림이라거나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잇는 국제적인 내용의 그림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답답했다. 어느 날 일본에 소장돼 있던 이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원화를 볼 수만 있다면 그림 <의모도>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는 오지 않았고 그저 막연한 의구심에 마음만 애가 탔다. 다시 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술사학자 이동주의 짤막한 글이었다.

‘박제가의 작품으로 전하는 <정성공초령의모도>는 진부에 대하여 물의가 분분한 작품이나, 나빙의 필봉이 가미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면이 있다.’(이동주, <한국회화소사>, 범우사, 1996.)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이유를 따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빙(羅聘, 1733~99)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박제가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4차례 다녀왔다. 1778년이 처음이었고 1790년 여름과 겨울의 연이은 북경 행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에 나빙이 있었다. 그는 제법 이름난 화가였다. 나빙은 당시 유명한 문인들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에 있던 자들과도 친분이 각별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서로간의 사귐이 깊었는지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면서 초상화와 매화그림 한 폭을 그려주었다. 몇 통의 편지글도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북경에서 만나는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눴던 것일까. 그 대화 속에 혹시 정성공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의 도움이 있었다면 <의모도> 탄생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질 것도 같았다. 그림은 정말 두 사람의 공동작품일까.

박제가가 그렸다는 ‘의모도’
서양풍에 전문화가 느낌 뚜렷

청나라 배워야한다 했던 박제가
왜 청에 맞선 정성공 그렸을까

이동주·정민 교수도 의문 제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일까


그렇게 나빙과 박제가의 만남과 교류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가는 중에 <의모도>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2014)에서 지은이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과)는 이 그림이 박제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글씨도 그의 것이 아니며 그림 상단에 첨부된 청나라 말의 학자 초순(焦循, 1763~1820)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림 아래에 찍힌 수장인의 도장도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누가 그렸는지 알 길이 없는 그림 외에 나머지는 다 가짜다.’ 다만 지은이는 화제의 내용 중 ‘최씨’(崔氏)를 언급한 대목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했다. 여기서 최씨는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 괴짜 화가 최북(崔北, 1712~86?)을 말했다. 그는 1748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기록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렇다면 <의모도>는 박제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오랫동안 이 그림에 의문을 품어온 내게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다. 좀 억울했다. 그림에 쓰인 글씨가 박제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의모도>의 글씨와 도장 모두 위작이라 해도 문제는 여전해 보였다. 바로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 때문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그림 <의모도>를 그리고 박제가의 이름을 빌렸다면 목적은 경제적인 이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돈을 목적으로 했다면 굳이 문제 생길 것이 자명한 정성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었을까. 차라리 사군자나 산수화를 한 폭 그리고 그 위에 박제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정성공의 일본 이야기라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의모도>의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흑백의 작은 도판으로만 보다가 실물에 가까운 원색의 그림을 마주하니 감개무량이었다. 실로 수십년 만에 만나는 친구 같았다. 박제가의 글씨도, 나중에 보태진 초순의 글씨와 수장인의 도장도 눈에서 지웠다. 오로지 그림만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구석구석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부분을 살폈고 먼발치에서 그림이 말하는 특별한 순간이 오기를 낚시꾼처럼 기다렸다.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그림으로부터 내게로 무언가가 건너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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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가 신상웅. 마음산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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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모도>는 예상보다 복잡했고 알 수 없는 상징들로 넘쳤다. 모호한 상징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 혹은 일본의 서로 다른 그림 스타일이 그 안에 혼재했다. 박제가가 썼다는 화제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그의 글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었다. 책만 읽는 게 아니었다. <의모도>는 ‘읽는 그림’에 가까웠다. 2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말을 건네고 있었고 의문의 실마리 역시 그림 안에 있어 보였다. <의모도>는 여전히 내겐 현재진행형이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궁금했다. 이젠 그림 <의모도>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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