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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선의’와 ‘대연정’은 어디에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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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대선 북리뷰] 안희정 관련 책 5권으로 읽어본 생각의 뿌리

혁명을 꿈꾸던 조숙한 소년은 “싸우지 않는다”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바쳐온 삶이었고 지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수형생활을 두 아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대선이라는 큰 판에서 생긴 어두운 면을 누군가는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정치의 새로운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과거의 정치를 떠안아야 했습니다.”

불법 정치자금 ‘구속의 상처’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2004년 8월10일, 기자가 안희정을 처음 본 곳은 법정이었다. 기업들한테 수십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받아 노무현 캠프에 전달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수의를 입은 안희정은 항소심에서 최후진술을 하며 간간이 울먹였다. 감정이 북받친 듯 말하다 말고 몇 초간 숨을 고르기도 했다. 징역 1년, 추징금 4억9천만원. 그해 12월10일 안희정은 만기 출소했다. 향후 5년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지만, 2006년 8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특사 사면·복권 명단에 그가 포함됐다.

불법 정치자금은 안희정의 아킬레스건이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다. 지난 3월14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합동 토론회에서 최성 고양시장이 “당시 판결문을 보면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던데 진실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눈빛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같은 당 동지에게 그런 방식으로 질문받을 줄 몰랐다”고 답했다. 해명도 했다.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시 변통한 건 사실이어서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대선 이후 내가 지역구 활동을 하기 위해 받은 개인 정치자금 일부의 문제다. 사과했고 책임도 졌다.”

구속의 기억이 안희정에게 남긴 상처는 깊어 보인다. 그가 쓴 책에는 이 대목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대선이 끝난 후, 10년 동지·벗들이 모두 청와대·정부로 떠나고 나 혼자 여의도에 남았을 때도 그랬다. 다시 1년 뒤 여전히 난 혼자 감옥에 앉아 있다.”(<담금질: 안희정의 새로운 시작>, 나남 펴냄, 2008)

안희정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팀장을 맡았지만,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뒤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됐고 노무현 캠프 ‘금고지기’로서 구속됐다. “안희정씨는 나를 위해 일해왔고,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에게 한없이 미안해했다.

“아이들에게는 감옥에 간 사실을 숨기고 갑자기 출장을 떠났다고만 해두었다. 4월의 어느 날 수사 검사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아 집에 전화를 했다. ‘아빠!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할 테니까 전화번호 알려줘요.’ ‘아빠 있는 곳에 전화기가 없구나. 다음에 아빠가 또 전화할게.’”(<안희정의 함께, 혁명>,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6) 출소한 뒤 안희정은 가족과 함께 심리 상담을 받았다고 썼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했다. 민주당 공천 기준을 새로 마련하는 과정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탈락시키기로 한 탓이다. “이렇게 갑자기 규칙이 바뀌면 억울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 내가 지은 죄는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자금을 마련하다가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나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에 감옥에 갔고 특별사면도 없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이후에도 나는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다. 그 정도면 나의 죗값을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다.”(<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안희정의 진심>, 위즈덤하우스 펴냄, 2013)

중도보수층 흡수하고픈 한때의 혁명가

안희정은 웃자랐다. 한마디로 조숙했다. 그는 1964년 충남 논산에서 2남3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다가 철물점을 열었고, 현금이 귀하던 시골에서 나름 지역 유지가 됐다. 야학 교사였던 누나의 영향을 받아 안희정은 고등학교 1학년인 16살에 <러시아혁명사>, 계간 <창작과 비평> 등을 읽고 민주주의 혁명을 꿈꾸다 제적됐다. 대학 입학 뒤 24살에 반독재를 외치다 투옥됐다. 1988년 반미청년회 조직 사건으로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하다 동료들의 이름을 ‘분’ 뒤 학생운동을 떠났다.

이듬해 그는 통일민주당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2002년 핵심 참모로 보좌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을 때 안희정의 나이는 38살이었다. 지금도 그는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젊은 53살이다.

그런데 가장 젊은 그가 ‘대연정’ ‘(이명박·박근혜의) 선의’ 등 가장 오른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동지’ ‘휴머니즘(또는 인간에 대한 사랑)’ 등 가장 고루해 보이는 단어를 써가며 입에 올린다. 중도보수층 표심을 흡수하려는 의도를 감안한다 해도 그에게선 ‘청년’보다 ‘아재’ 냄새가 난다.

그럴 만한 까닭과 곡절이 있다. 안희정과 관련한 책을 읽기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사를 쓰기 위해 모두 다섯 권의 책을 살폈다. 책을 덮고 난 뒤 안희정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온 생애사와 정치적 역사에 비춰볼 때, 그때마다 그가 내린 결단 또는 결정을 거울 삼아 볼 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감은 되지 않아도 이해는 될 것 같다.

안희정이 직접 쓴 네 권의 책은 하나같이 그의 정치적 결단 시기에 맞춰 나왔다. <콜라보네이션: 시민×안희정>(스리체어스 펴냄)과 <안희정의 함께, 혁명>은 2016년 8월과 10월 잇따라 출간됐다. 대선 출마를 겨냥한 의도가 다분히 읽힌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안희정의 진심>은 충남도지사 재선을 앞두고 나온 책이다. <담금질>은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뒤 안희정이 충남 계룡·금산·논산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며 쓴 책이다. 책의 일부 내용은 겹치거나 아예 문장 자체를 베껴 쓴 것처럼 똑같다. 안희정이 궁금하다면 이 가운데 한 권만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안희정의 길: 우리 함께 걸어요>(한길사 펴냄, 2017)도 나왔다.

안희정의 인생을 좀더 드라마처럼 재밌게 접하고 싶다면, 박신홍 <중앙일보> 기자가 노무현의 ‘동업자’였던 ‘좌희정 우광재’를 인터뷰해 쓴 책을 읽는 게 낫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까지 안희정과 이광재라는 ‘주인공’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구실을 했는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안희정과 이광재: 노무현의 동업자들 운명에서 희망으로>, 메디치미디어 펴냄, 2011)

“자유총연맹 동지 여러분!”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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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은 글쓰기를 즐긴다. 인터넷에 개인 블로그를 운영했고 일기도 썼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년간 감옥에 있을 때는 “어깻죽지가 아프도록 많이 썼다”. 노트 39권, 볼펜심 26개를 썼다. <담금질>의 절반가량은 ‘2004년의 옥중일기’로 채워졌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생각의 변화가 읽힌다. 이를테면 ‘대연정’ 고민의 싹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과제는 끝난 것인가?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책무는 계속되어야 한다. 21세기식 민주주의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1970~1980년대 변혁운동의 뿌리에는 휴머니즘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든 진보개혁운동의 원천이었음을 명심하라.”(<담금질>)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여의도 정치판을 떠나 고려대 철학과에 10년 만에 복학했던 1994년 무렵 안희정이 쓴 글이다.

휴머니즘에 터 잡은 민주주의를 향한 절대 믿음을 갖게 된 안희정은 “안 싸우는 정치”를 하고 싶어 한다. 그는 2008년 <담금질> 출판기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겪은 부모님 세대의 한도 눈물도, 좌우 대립의 와중에 희생된 친척들의 역사도 모두 이어받겠습니다. 미움과 대립을 떨쳐내지 못하면 21세기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반듯한 주류 세력으로 다시 서겠습니다.”(<안희정과 이광재>)

글에서도 이런 마음이 엿보인다. “나에게도 분노가 있다. 정의가 패배했던 역사에 대한 분노가 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칼끝을 겨눴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것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꿈꾸는 ‘더 좋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중략) 분노와 미움이 더 이상 우리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더 좋은 민주주의’다.”(<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선의’와 ‘대연정’은 이렇게 안희정의 사유 안에서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2013년 충남 홍성에서 열린 반공단체 자유총연맹 총대회 축사에서 그는 “자유총연맹 동지 여러분!”이라고 스스럼없이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권과 사유재산권과 자유시장 질서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는 (386과 자유총연맹이) 같았다”고 생각하고, 또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국민을 동원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지지 기반의 정치 성향에 기초해서 5천만 국민의 실질적 이익이 무엇이냐는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 더 나은 길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고 있다. 그저 상대방을 향한 미움과 불신을 강조하며 온 국민에게 단결해달라고 요청할 뿐이다. 본말이 전도되었다. 국민은 보다 안전한 삶의 조건과 유리한 경제 번영의 기회를 바라지, 누구와 한판 싸우는 쪽으로 뭉치기를 원하지 않는다.”(<콜라보네이션>)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여소야대 국회를 상대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패, 야당의 불모지 충청도에서 도지사로 일한 6년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테다. “노무현 대통령이 야당에게 연정을 제안했던 일, 사학법 개정으로 마비된 국정을 풀기 위해 노 대통령이 여야 원내대표를 불러놓고 야당의 입장을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던 일 등을 종종 떠올린다. 충청남도 의회가 1 대 3 여소야대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껏 의회와 사생결단의 의지를 갖고 싸워본 적은 없다.”(<안희정의 함께, 혁명>)

안희정의 ‘더 좋은 민주주의’?

안희정은 “나의 사상은 분명하고 확고하다”고 썼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나는 개인의 사적 재산권에 기초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장경제를 주장한다.” 그에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대화이고, 소통이다. “‘나는 정의, 너는 불의’라는 이분법적 태도로는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힘들다. (중략) 국가 지도자는 나의 정치적 반대자와 대화하고 기꺼이 친구가 돼야 한다.”(<콜라보네이션>)

과연 20주 동안 주말마다 촛불을 들어 대통령을 탄핵시킨 시민들이 꿈꾸는 ‘민주주의’도 안희정의 생각과 같을까? 과연 대연정이 ‘더 좋은 민주주의’와 ‘새로운 정치’로 통하는 길일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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