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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열린 포럼] 소록도에서 비롯된 國格 지키는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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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정록 전남대 지리학과 교수


지난 6일 서울서 열린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시사회에 참석했다. 다음 달 개봉 예정인 영화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을 한평생 돌본 이방의 간호사들 이야기를 엮은 다큐멘터리였다. 영화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한편 부끄럽게도 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그리스도 왕 시녀회' 소속 간호사다. 마리안느는 1962년 27세 젊은 나이로 소록도에 왔다. 마가렛은 경북 왜관과 전북 고창의 한센인 마을을 거쳐 31세이던 1966년 소록도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가난했던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소록도에 사랑의 천막을 쳤다. 매일 우유를 끓여 환자에게 나눠 줬다. 한센인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영아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음성 환자 정착 사업도 도왔다. 그렇게 40여 년을 봉사하다 2005년 11월 22일 천막을 거뒀다. 늙고 병든 자신들이 소록도 병원에 짐이 될까 봐서 그랬다.

두 사람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났다. 이들이 봉사하는 동안 소록도 병원은 봉급을 주지 않아도 됐다. 퇴직금은 당연히 없었다. 2005년 귀국할 때까지 두 사람은 자원봉사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가 보내는 후원금이 고작이었다. 쥐꼬리만 한 그 돈도 한센인을 위해 몽땅 썼다. 문제는 두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지 못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소록도 성당 김연준 보좌신부는 그렇게 보낸 것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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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국립 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을 간호하던 피사렛 마가렛(왼쪽) 수녀와 스퇴거 마리안느 수녀. /법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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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 신부는 빈손으로 떠난 두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다. 박병종 고흥군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2015년 고흥군은 마리안느·마가렛 선양 사업을 위한 조례를 만들었다. 작년엔 두 사람에게 각각 매달 '1004달러'를 지급하는 고흥식(式) 연금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10년 치 연금을 송금했다. 지역사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소록도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정신을 잇기 위한 '마리안느·마가렛 봉사 학교'를 짓고 있다. 내년 개교하면 한국형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많이 배출해 국내외로 보내게 될 것이다.

소록도가 어떤 곳인가. 한센병 환자의 슬픔과 절망이 배어 있는 공간이다. 곤궁했던 대한민국과 봉사에 무지한 우리가 외면하고 무시했던 곳이다. 그 소록도에서 평생을 보낸 천사들이 치매를 앓고 있고 무일푼으로 산다는 소식을 접한 시골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은혜를 갚고 있으니 얼마나 감동적인가. 과거 대한민국이 어려웠을 때 마리안느와 마가렛 같은 외국인 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우리를 도왔다. 세계 13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우리가 이제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국격은 지도자의 화려한 의상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비선 실세의 사익(私益)을 위해 대통령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 파면된 경우는 더욱 아니다. 대통령을 잘못 보필했다고 고해하는 엘리트 참모를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서울 공화국'에서 국격을 논해 뭐하겠는가. 쌈짓돈으로 은인을 기리는 영화와 연금을 만들어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는 '촌(村)' 동네가 돋보이는 이유다. 그 시골에 국격을 지킨 리더십이 있었다.

[이정록 전남대 지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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