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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안끝나는 ‘박근혜 드라마’, 정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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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125



한겨레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박근혜 현상’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부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까지 현직 대통령은 이명박이었지만 ‘차기 대통령’은 박근혜였습니다. 박근혜 의원은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2012년 12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후보 지지도에 육박할 때까지 그랬습니다.

2010년 야당과 가까운 정치 전문가들이 모여서 <박근혜 현상>이라는 책을 쓴 일이 있습니다. 정권교체를 하려면 박근혜를 넘어서야 했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종욱, 김헌태, 안병진, 이철희, 정한울 등 다섯 사람이 필자로 참여했습니다. 이철희씨는 지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이철희입니다. 책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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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으로 출발한 뒤 삼성동 자택 근처에서 지지자들이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적힌 팻말과 태극기를 들고 있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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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현상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 원인이나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지 모르나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박근혜’라는 정치인은 과거의 3김과 달리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다. 별다른 고난도 겪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정치권 내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고 있다. 이를 지칭하는 것이 박근혜 현상이다.”

서문에서부터 필자들의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책 마지막 편에는 다섯 사람의 좌담을 실었습니다. ‘박근혜를 도와주는 정치 컨설턴트라면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단지 학자로서 시대적 소명에 대한 무거운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 한국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건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보와 서로 상호 견제하고, 상호 혁신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한국은 천민보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박근혜가 테오도르 루스벨트 전 보수 대통령처럼 시대인식을 갖고 정치나 재벌의 독점권력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신도 몰락하게 만들 것입니다.”

탄핵 이후에도 정국 좌우하는 최대 변수로 작용

201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는 안병진 교수의 우려대로 ‘천민보수’였습니다.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신도 몰락했습니다. 앞날을 내다 본 안병진 교수의 통찰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7년 전 책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2017년 현재를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이전에 많은 전문가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이후 정국에 대해 세 가지 정도의 변화를 예상했습니다.

첫째, 박근혜-최순실 국정 사유화 및 농단 사태의 반사이익으로 형성된 ‘문재인 대세론’은 조정 국면을 맞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안희정 이재명 후보가 추격의 계기를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습니다.

둘째, 탄핵 책임론으로 자유한국당 지지도는 떨어지고 바른정당 지지도는 올라갈 것으로 봤습니다. 같은 이치로 자유한국당 친박 성향의 정치인들은 정치판에서 사라지고 바른정당의 유승민 남경필 후보의 지지도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셋째, 개헌을 고리로 한 제 3지대 정계개편 움직임이 활성화 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른바 빅텐트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었습니다.

정계개편·개헌 힘들어져…각당 대선후보 경선도 묻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정국을 살펴보면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문재인 대세론’은 요지부동입니다. 안희정 이재명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을 대상으로 한 경쟁에서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기도 힘겨워 보입니다.

둘째, 자유한국당 지지도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탄핵반대 집회에 참석했던 김진태 이인제 후보와, 박정희 향수를 등에 업은 김관용 경북지사가 자유한국당 경선에서 2차 컷오프를 통과했습니다.

‘비박’이었던 홍준표 경남지사는 처음에는 친박세력을 향해 ‘양아치 친박’이라고 퍼붓다가, 슬그머니 “김진태 의원은 국민 대다수가 탄핵을 하자고 하는데도 탄핵에 맞선 용기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거나, “양아치 친박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물러서고 있습니다. 친박 표심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정당 지지도는 올라가지 않고 있습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남경필 후보는 지지도가 너무 낮아 여론조사에서 아예 빠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셋째, 정계개편이나 개헌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종인 전 대표는 한동안 대선주자들과 ‘식사 정치’를 하고 다녔지만 탄핵심판 이후에는 정치뉴스에서 사라졌습니다.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원내대표들은 개헌안 마련과 개헌 발의에 전격 합의했지만, 국민의당에서 박지원 대표, 안철수 전 대표가 반대하고 나서면서 발이 꼬였습니다. 대선 전 개헌안 발의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입니다. 탄핵심판 이후에도 박근혜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뉴스는 온통 박근혜뿐입니다.

몰락한 공주 신화적 요소로 온국민의 관심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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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3.1절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태극기를 두르고 연설하고 있는 김진태 의원. 김진태 의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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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흥행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각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 사법처리 임박’이라는 드라마에 비해 훨씬 재미가 없습니다.

박근혜가 뉴스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좀 부족해 보입니다.

박근혜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은 여러 측면에서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신화’의 종말은 결국 비극입니다.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공주가 있었습니다. 왕비가 총에 맞아 죽자 공주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느 날 왕도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공주는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공주는 자신의 영혼을 사이비 교주와 그의 딸에게 맡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옛날 왕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은 공주를 궁으로 불러들여 여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여왕의 영혼을 여전히 쥐고 있던 교주 딸은 여왕을 꾀어 부자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왕과 교주 딸의 범죄는 발각됐고 여왕은 다시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여왕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검찰의 수사와 앞으로 벌어질 재판은 비극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클라이막스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습니다. 검찰은 하루나 이틀 정도 고민하는 모양새를 갖춘 뒤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법원은 구속영장실질심사를 할 테고 구속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영장이 발부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의를 입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이 시작되면 매 재판마다 온국민과 세계의 시선이 집중될 것입니다.

‘공주 출신 비련의 여왕이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장면’과 여왕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정치인들의 경쟁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을까요? 박근혜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비극에 비하면 5·9 대통령 선거는 상대적으로 흥행 요소가 떨어진다는 얘깁니다.

2010년 <박근혜 현상>에도 이와 비슷한 분석이 들어 있습니다. 여론분석가이자 문화연구자 김헌태 교수의 글입니다.

“한국 대중과 박근혜의 조우는 미디어가 재현해 낸 ‘대통령의 딸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공주 또는 집안 좋은 미혼여성을 만날 때 가지는 기존의 의미구조, 즉 ‘공주의 신화’를 떠올리며 그녀를 만나게 된다. ‘왕의 딸’이라는 인식의 구조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응대하는 우리의 프레임 한가운데에 있다. 따라서 ‘홀로서기’를 해 나가는 그녀에 대한 응원은 마치 브라운관 앞에서 사극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과도 같다.”

동정론 역풍 불면 5·9 대선에 상당한 영향줄 듯

큰일입니다. 사실 전직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에서 쫓겨나고 또 감옥에 갇히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딱한 일일 수 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과 60대 이상 고연령층은 강하게 반발할 것입니다. 대구·경북 민심을 잘 알고 있는 전직 의원은 “대구·경북 사람들은 박근혜에 대해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대구·경북 여론조사는 바닥 민심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의를 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타나면 ‘불쌍한 박근혜’, ‘박근혜가 도대체 뭘 잘못했느냐’는 강한 동정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사유화 및 농단 사태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때 ‘사랑하고 지지했던 박근혜’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핍박하는 것은 참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그런 것입니다. 못난 자식에게 매질을 하다가도 그 자식이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두들겨 맞고 들어오면 팔을 걷고 나가서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남경필 후보가 구여권 지지자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어쨌든 너희들 때문에 박근혜가 저렇게 됐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자유한국당의 친박세력은 이러한 유권자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구·경북과 고연령층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박근혜 동정론’을 5·9 대선국면에서 철저히 활용할 것입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대선 이후 박근혜와 친박세력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지 철저히 계산해서 움직일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삼성동 자택 주변에는 지금도 이른바 ‘태극기 부대’가 진을 치고 “탄핵 무효”를 외치고 있습니다. 동네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해달라”는 한 마디 말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검찰에 출두하는 날 “많이들 오셨네요”라고 했고, 차 안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월27일 헌법재판소에 낸 의견서에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서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모아서 혼란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행동을 보면 그 말은 확실한 거짓이었습니다.

걱정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말대로 이제 대한민국은 혼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5·9 대선에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고 경제위기와 안보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힘을 모아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대한민국을 인질로 붙잡고 있습니다. 건전한 보수의 출현을 온몸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여권 보수 세력 전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반도 상공에서 박정희와 최태민의 유령이 사라지는 것은 과연 언제쯤일까요? 언젠가 사라지기는 하는 것일까요? 답답하기만 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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