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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유레카] 벙커의 히틀러 / 고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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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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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벙커의 히틀러는 일찍 늙어 어깨가 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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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에 패색이 짙어졌다. 1944년 7월20일 북유럽신화 속 반신 ‘발키리’에서 암호명을 딴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행에 옮겨졌다. 볼프샨체에서 열린 전시 최고회의 탁자 밑에서 시한폭탄이 터졌다. 탁자의 두꺼운 다리에 막혀 폭탄은 목표물을 잡지 못했다. 살아남은 히틀러는 이 기사회생의 사건을 독일군의 전세 역전과 최종 승리를 알리는 전조로 해석했다. 그러나 전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부전선 연합군과 동부전선 소련군의 협공으로 독일군은 패주를 거듭했다. 1945년 1월 히틀러는 베를린 총통 관저 지하에 만든 두께 3.5m의 콘크리트 벙커로 숨어들었다. 총통은 벙커의 전쟁사령부에서 전선의 지휘관들을 닦달했지만 전세는 뒤집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월9일 히틀러는 군수장관 슈페어에게 독일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보다 정신이 멀쩡했던 슈페어는 초토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엘베강 서쪽을 장악하고 소련군이 베를린 동쪽 30㎞ 지점까지 진격했다. 히틀러와 최측근 괴벨스는 끊임없이 별점을 쳤다. 믿을 것은 별들의 조화밖에 없었다. 4월 중순 이후 전황에 일대 변화가 올 것이라는 괴벨스의 말에 총통은 한 번 더 희망을 품었다. 4월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죽자 히틀러는 이 사건을 다가올 기적의 예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늘의 별도 절대권력자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장악한 4월30일 히틀러는 전날 결혼한 에바 브라운과 함께 삶을 끝냈다. ‘청와대 벙커’에서 나와 ‘삼성동 벙커’로 들어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검찰청 포토라인에 섰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망상을 붙들고 친박 부대의 떠들썩한 소란에 복귀의 꿈을 실어보았지만 결과는 ‘파면’이었다. 이제 검찰의 기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겠다는 것일까.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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