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시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5년 전, 전남 강진에서 단편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성요셉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독특한 상영회였는데, 특히 ‘관객과의 대화’는 예측 불허의 연속이었다. 총기와 똘끼가 섞인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당황했지만, 아이들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은 유쾌하고 흥미진진했다. 그 즐거운 시간 끝에 마이크는 마지막 질문자에게 넘어갔다. “입시와 관련해 궁금한 게 많은데, 혹시 연락처를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그 질문자가 바로 도양이었다. 분위기에 취한 나는 흔쾌히 e-메일 주소를 알려 줬다. 그러나 처음 했던 말과 달리, 그녀의 관심사는 입시가 아니라 온통 ‘서울에서의 자취 생활’이었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상경하려 했던 도양은 “독립 절대 불가!”라는 부모님과의 첫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졸업 후 더욱 격렬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지만, 극적으로 취직에 성공하며 드디어 서울 생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상경 후 도양은 한참 동안 연락이 없었다. ‘처음 만난 자유에 푹 빠져 있겠지’ 하며 기다리길 한 달여쯤, “언니, 나 밥 좀 해 줘…” 축 처진 목소리의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친 얼굴의 도양을 만나 이것저것 먹이자, 그제야 조금 기운이 난 그녀가 “최언니 때문에 미칠 것 같아”라며 말을 시작했다. 도양이 살게 된 셰어 하우스에는 34세의 ‘최언니’가 살고 있다. 품행이 단정해 마음에 쏙 드는 동거인이라며 내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도양은 “매일 밤마다 대화를 나누자며 방으로 찾아오는데,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 집에 늦게 들어와 피곤한 날에도, 새벽 2시가 넘도록 놔주질 않아. 더 심각한 건, 대화 내용이 날마다 똑같다는 거야. 바로 최언니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는 일대기. 내가 우리 엄마 일생보다 최언니 일생을 더 잘 안다는 게 말이 돼?”라며 답답해 했다. 나는 무심코 “생판 모르던 남이랑 함께 산다는 건 원래 어려운 일이야”라며 영혼 없는 조언을 던지고 말았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자극한 듯 “나도 알아, 언니가 말한 드라마도 다 봤단 말야!”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고 말았다. 도양이 셰어 하우스에서 살게 됐다고 했을 때 한번 봐 두길 추천했던 TV 드라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드라마 ‘라스트 프렌즈’(2008, 후지TV)와 시즌2 제작이 확정된 ‘청춘시대’(2016~, JTBC)다. 두 작품 모두 ‘셰어 하우스에 모인 청춘들이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과 타인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드라마 속 그들처럼 최언니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을지 모른다며 지금껏 참아 왔어. 그런데 매일 그 언니 인생 얘기를 들어 보니, 그건 절대 아냐!”
라스트 프렌즈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라스트 프렌즈’는 트랜스젠더, 데이트 폭력, 성관계 공포증 등 지금껏 TV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어 각 인물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각자 버거운 고민에 휘청대다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청춘시대’의 주인공들 역시 남에게 말 못할 비밀을 갖고 있다. 여기에 공통으로 흐르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스무 살 은재(박혜수)’ ‘식물인간 동생을 죽이고 싶은 고학생 진명(한예리)’ ‘자신이 살기 위해 모르는 소녀를 죽게 만든 이나(류화영)’ 등. 그들의 트라우마는 ‘신발장 귀신’의 형태로 나타나 모두를 괴롭힌다. 그렇지만 결국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한집에서 살아가며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라스트 프렌즈’에서는 대안 가족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고, ‘청춘시대’에서는 귀신의 존재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일상으로 돌아간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도양의 생각처럼 최언니의 삶은 평탄하기만 했을까? “만약 최언니에게 엄청난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막상 그런 순간이 닥친다면 상대방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게 되지 않을까?” 내 얘기를 듣던 도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노려보았다. “좀 투덜거리러 왔더니, 여기는 갑자기 영화를 찍네. 최언니보다 언니랑 사는 게 더 피곤할 것 같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단다, 도양아.
조슬예
‘잉투기’(2013) ‘소셜포비아’(2015) 등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 남의 얘기를 듣는 것도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해 ‘아는 사람 이야기’까지 연재하게 됐다. 취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다 떨기.
▶SNS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포스트]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