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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김현기의 시시각각] 어처구니없는 한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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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국왕 대신 온 ‘대타 장관’에 면박당하고

미 국무장관이 대놓고 불쾌감 표하는 외교 현주소

중앙일보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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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비행기에서 계단 트랩이 아닌 금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을 처음 봤다. 주인공은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82)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살만 국왕이 한 달에 걸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몰디브·브루나이·일본·중국 등 아시아 6개국을 돌 때마다 사우디에서 공수해 온 이동식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했다. 그뿐 아니다. 살만 국왕의 벤츠 특수방탄차량은 대당 15억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타는 차량보다 30%가량 비싸다. 여기에 수행한 황태자가 25명, 방문단은 1500명.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에서의 만찬 행사엔 차량 750대의 행렬이 4㎞ 이어지는 장관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우디 국왕은 좀처럼 해외에 나가지 않는다. 일본은 46년, 중국은 11년 만이다. 하지만 한번 나가면 뻑적지근하게 돈을 뿌린다. 말레이시아에 가선 8조원, 인도네시아에선 17조원의 투자 약속을 했다. 중국은 무려 28조원이다. 일본에선 세계 최대의 기업공개(IPO)가 될 정유사 아람코의 일본증시 상장을 약속했다. 아람코의 기업 가치는 최대 2조 달러(약 2262조원). 이것만 성사되면 일본은 엄청난 대박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은 쏙 빠졌다. 한국은 세계에서 사우디산 원유를 넷째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말하자면 아시아 최대 고객 중 하나다. 하지만 살만 국왕은 등을 돌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불안. 가 봐야 소용없다는 얘기다. 우린 지푸라기라도 건지듯 국왕을 수행하던 장관 10명 중 1명인 파키흐 경제기획부 장관을 일본으로 가기 전 잠시 한국으로 불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유일호 경제부총리와의 면담도 세팅됐다. 하지만 유 부총리가 “사우디의 메트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자 파키흐 장관은 “그러고 싶으면 우리 사우디의 국부펀드에 들어오시라”고 되받았다고 한다. 투자 유치 보따리를 챙기기는커녕 대타로 온 일개 장관에게 훈수나 듣는 신세가 됐다.

한국을 건너뛰고 통과하는 ‘코리아 패싱(passing)’. 단골 성형외과 원장 중동 순방이나 챙겨 주고, 수주 실적은 뻥튀기하고, 결실도 못 챙기면서 미·중 외교에 치우친 종합적 응보다.

대미 외교의 실태는 더 가관이다. 지난주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한국을 떠나며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들(한국)로부터 만찬 초대를 받지 않았다. 그들(한국 정부)은 막판에 가서 (만찬을 하지 않으면) 대중적으로 보기에 본인들에게 좋지 않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피곤해 만찬을 하지 않았다고 공표했다”는 반박은 가히 최고 수위의 불쾌감 표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조차 한국 정부 내에서의 온갖 반미 발언에도 공개적 자리에선 입을 굳게 닫았던 미국이다. 우리 외교부는 “의사소통에 혼선이 있었던 것 같다. 향후 설명이 있을 것”이라고 물러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전 세계에 그렇게 각인됐다. 실무협의 과정에서의 미국 측 실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틸러슨이 이런 이례적 발언을 대놓고 했다는 자체가 우왕좌왕 한·미 관계, 나사 빠진 한·미 소통, 격하된 한·미 동맹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이게 바로 ‘코리아 패싱’이 아니고 뭐겠는가. 뿔난 틸러슨 장관에게 진사라도 하듯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불과 회담 나흘 만인 21일 우리에겐 별로 시급하지도 않은 미 국무부 주최 ‘반이슬람국가(IS)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한다. 자주 얼굴을 보겠다는 것까지 탓할 순 없지만 영 개운치 않다.

더 우려스러운 문제는 이번에 윤곽이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대북정책과 정반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우리 야당 대선주자들과의 괴리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재와 압박’이란 기존 대북정책에 ‘곱하기’를 하려 하는데 우리 주자들은 ‘빼기’, 아니 ‘나누기’를 주장한다. 북·미 간, 미·중 간 충돌보다 한·미 간 충돌이 먼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때는 ‘코리아 패싱’은 고사하고 한·미 동맹 64년의 최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우리 주자들은 그런 각오가 돼 있는가.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기자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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