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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매거진M] 뱅상 카셀X모니카 벨루치,'라빠르망' 속 열쇠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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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1990년대 중반, 전 세계 영화계는 서사의 혁명을 맞이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리우드와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이 흐름 속에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일한 시점의 이야기를 해체하고 다중적 관점에서 엇갈린 시간대의 이야기가 평행으로 펼쳐졌다. 유럽에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시리즈(1993~1994)가 있었다면, 할리우드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1994)이 등장했고, 아시아에선 왕가위(王家?·왕자웨이) 감독의 ‘중경삼림’(1994)이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이 영화들의 서사 스타일은 이후 수많은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라빠르망’도 그 흐름에 있는 영화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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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빠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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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뱅상 카셀)에겐 연인 뮤리엘(상드린 키베를랭)이 있다. 하지만 우연히 옛 연인 리자(모니카 벨루치)에 대한 단서를 얻은 그는 리자를 추적하고, 이때 자신을 리자라고 주장하는 알리스(로만느 보링거)를 알게 돼 빠져든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가 숨 가쁘게 교차하며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여러 모티브가 반복 사용된다. 편지, 꽃, 불…. 그중 하나가 바로 열쇠다. ‘라빠르망’에서 열쇠는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구체적 사물이며, 동시에 상징적인 소도구다.

비즈니스를 위해 들른 레스토랑의 공중전화에서 막스는 우연히 리자의 목소리를 듣고 뒤쫓지만, 리자는 사라지고 열쇠 하나만 남아 있다. 라파엘 호텔 413호. 왜 그녀가 그 열쇠를 공중전화 부스에 두고 갔는지 모르지만, ‘라빠르망’의 스토리는 막스가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장 일본 도쿄로 출장 가야 하지만, 막스는 리자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는 라파엘 호텔 413호에 찾아가지만 아무도 없고, 그 대신 신문 기사 조각이 있다. 그것은 유명한 미술상 다니엘(올리비에 그랑니어)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고 기사다. ‘열쇠’라는 단서는 ‘신문 기사’라는 또 하나의 단서로 이어지고, 막스는 혹시 리자를 만날까 장례식에 가지만 헛수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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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을 추적하는 막스. 이때 다니엘은 어느 열쇠 상점에 들러 열쇠 복사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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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리자의 아파트 우편함에 열쇠 하나를 넣는다. 막스는 그 열쇠를 몰래 훔치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여자가 바로 알리스. 이후 알리스의 숨겨졌던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극은 점입가경이 된다. 한편 알리스와 밤을 보낸 막스는 도쿄 출장 일정을 예약한 후, 여행사 앞에서 열쇠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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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리자를, 혹은 자신을 리자라고 주장하며 리자의 공간에 살고 있는 여인을 잊으려는 걸까? 그렇게 약혼녀인 뮤리엘에게 돌아오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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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행동은 번복된다. 이후 티켓을 받으러 다시 여행사를 찾았을 때, 그는 안간힘을 쓰며 버렸던 열쇠를 다시 손에 넣는다.

이때 그의 뒤엔 리자가 있다.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티켓을 취소하기 위해 여행사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열쇠를 다시 찾으려는 막스의 행동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시야에 잡히지 못한 채 엇갈려 결국 재회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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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빠르망’의 제법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관통하는 사물은 열쇠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열쇠로 연결된다. 막스는 우연히 리자의 호텔방 열쇠를 습득하면서 그녀를 환기한다. 막스는 다니엘의 열쇠를 훔치면서 리자 대신 아파트를 쓰고 있는 알리스와 만나게 된다. 리자와 알리스는 친구인데, 알리스는 종종 리자의 자동차를 빌려 쓴다. 카메라는 해골 모양의 열쇠 고리 장식을 부각시켜 보여 준다. ‘라빠르망’에서 열쇠는 스토리가 지닌 비밀의 문을 여는, 말 그대로 열쇠인 셈이다.

글=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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