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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정동칼럼]‘인간에 대한 예의’ 말할 자격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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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고 배려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있으며 결과에 대한 정당성 못지않게 과정 절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게 대한민국의 역사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지난 27일 열렸던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서 나온 말이다. 내용으로 짐작하면 소추위원 측이 했을 법하지만 이는 박근혜 대통령 입장문의 한 대목이다. 일방적인 주장과 변명, 거짓으로 일관된 최후진술서를 읽어가다 이 부분에 이르러 화를 누르기가 어려웠다. 박근혜는 자신이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하고, 부정한 청탁을 받지도 들어주지도 않았단다. 그런 주장이야 어이가 없다 해도 필사적으로 법적 처벌을 면해보려는 몸부림으로 보여 그냥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다.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 인간에 대한 예의, 과정과 절차의 정당성.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인간’ 박근혜는 얘기할 자격이 없다. 박근혜에게 소수자라는 말은 생경하기만 하다. 지난 4년 재임기간 동안 박근혜가 장애인·이주민·성소수자·미혼모·성매매 여성 등 소수자를 위해 무슨 보호와 배려를 했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인권의 기본 명제를 그가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최후진술서에서 “글로벌 기업의 부회장이 뇌물공여자로 구속까지 되는걸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박근혜가 말하는 소수자는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보은하려 한 것을 뇌물제공으로 오해받은” 이재용과 같은 특권소수뿐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 언급은 더욱 참기 어렵다. 국민에 대한 무례로 느껴진다. 아이들이 배 안에서 죽어가는데 머리 손질할 생각부터 하는 대통령이 인간의 예의를 이야기하다니 말문이 막힌다. 진상 규명이라도 해달라고 애타게 호소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던 대통령이다. 뿐이랴. 갑작스러운 화재로 망연자실한 대구 서문시장을 찾아서는 상인들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않은 채 사진 한 장 찍고 서둘러 빠져 나온 사람이다. 그런 이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들먹이다니.

측근과 보좌진이 줄줄이 잡혀가도 청와대 문을 걸어 잠그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모습을 볼 때면 섬뜩하기조차 하다. 언론의 의혹은 전부 거짓말이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단다. 검찰과 특검, 언론에 의해 “엮여도 너무 엮였으며” “사람을 때려잡으려(김평우 변호사)” 한다는 것이다. 사법기관의 수사를 부인하는 궤변이며 최소한의 염치나 책임감을 찾아보기 어려운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과오까지 한꺼번에 싸안고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리더와 책임자 본연의 모습이다. 탄핵 소추위원의 지적대로 “대통령 비서진이나 공무원의 범죄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보다 박 대통령이 맹목적 충성을 이용했던 것이라 (대통령이)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하기야 대한민국이 곧 자신의 사유물이고 비서진이나 공무원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노예’쯤으로 생각하는 박근혜에게 염치나 책임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이 결여된 얼음공주의 싸늘한 심장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나 감정을 뛰어넘는 언행을 감행하는 박근혜를 해석하기란 참 어렵다. 역사를 떠올려 봐도 비슷한 유형의 인물을 찾을 수 없다. 국정농단과 헌법 유린, 권력의 사유화와 각종 비리 등 차고 넘치는 탄핵 사유와 별개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박근혜의 인간성은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다.

그런 그가 “20대 초반 어머님을 여의고 아버님을 모시며 퍼스트레이디를 하면서…”라는 동정여론을 업고 태극기세력의 규합을 통해 판 뒤집기를 꾀하고 있다. 사람들의 연민과 선의를 자신의 권력유지에 악용하는 데는 남다른 유능함을 발휘한다. 두 차례나 대국민사과를 통해 검찰과 특검의 수사를 받겠다고 한 약속은 끝내 지키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돌연 약속을 뒤집고 오히려 정면 돌파에 나선 모양새다. 그러고도 과정과 절차의 정당성을 말하니 우스울 뿐이다.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이 임박했다. 대통령 변호인들 중 일부는 불복 가능성을 암시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주권자 국민의 염원대로 탄핵이 인용된다 해도 험난한 앞날이 예고된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은 기대한다. 제발 몽니나 추태를 부리지 말고 탄핵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을. 무능한 대통령을 견디기도 힘들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결여한 그 민낯을 마지막까지 목도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문경란 |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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