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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The Table] 가끔은 소원한다… 내게도 '도깨비'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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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윤 기자의 퇴근길, 혼자]

배우들을 향해 박수가 쏟아지고, 컴컴했던 무대가 돌연 환해진다. 영화관이라면 엔딩크레디트라도 올라갈 텐데, 그래서 마지막 여운이라도 좀 더 느껴볼 텐데, 공연장은 좀 다르다. 두어 시간 에너지를 쏟아내는 배우들에 극렬하게 몰입하다 불이 확 켜지면 돌아오는 현실! 배우들 빠져나간 텅 빈 무대를 보고 있으면 공허하기 짝이 없다.

마치 '레드선' 주문에라도 걸린 듯, 시간 여행자가 되어 다른 세상을 둘러보다가 '내일 출근해야지!'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다. '공연' 담당을 맡게 된 뒤 거의 매일 밤 벌어지는 일이다. 우르르 서두르는 이들 틈에 끼어 홀로 공연장을 빠져나가다 보면 가끔은 '내게도 도깨비가 있었으면' 소원한다. 촛불이라도 켰다가 후, 하고 불어볼까? 손발을 에는 추위가 허리춤까지 시리게 하는 날은 더욱 그렇다. 성냥팔이 소녀가 그어버린 마지막 성냥불 속 따스한 가족의 모습같이 잠시 잠깐의 온기라도 느끼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드라마 '도깨비'는 그 존재가 신화 속에서나 마주하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날 위해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 자체로 신화적이다. 주인공이 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고, 뒤에서 정성을 다해 응원하는 '키다리 아저씨'(공유의 '기럭지'만으로도 '키다리 아저씨'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다)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 되고, 나만을 위해 존재해주는 게 어디 쉬운가. "나의 생이자 사인 너를 좋아한다. 때문에 비밀을 품고, 하늘에 허락을 구해본다"고 고백하는 도깨비(공유)의 사랑 이야기가 판타지로 읽히는 건 그런 애틋함과 풋풋함을 현실에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연출가 오태석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네 사회상을 오태석 특유의 상징과 해학으로 풀어낸 작품 '도토리'의 마지막 공연 때다. 모자 달린 집업 티셔츠 차림의 일흔일곱의 '청년' 오태석은 "우리네 가슴속에 숨 쉬고 있는 순박함이 그립다"면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김유정의 '봄봄' 같은 작품에서처럼 동화 같은 마음을 우리 모두는 분명 갖고 있는데 왜 이리 서로에게 상처를 주려는 데 골몰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너를 위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너를 밟아야 내가 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누구의 잘못일까.

'도깨비' 재방송을 정주행하다 문득 소설 '키다리 아저씨'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주인공 주디가 아저씨에게 보낸 편지 중 마음에 든 글귀가 보여 적었다. '좋은 성격은 추위나 서리에 상처받으면 풀이 죽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살을 만나면 쑥쑥 자라난답니다. 저는 역경과 슬픔과 좌절이 정신력을 강하게 한다는 주장에 반대해요. 자신이 행복해야 비로소 상대방에게 친절도 베풀 수 있는 법이거든요.' 어디선가 존재해줬으면 하는 키다리 아저씨를 기다리며 '그분'께 편지 한 줄 써야겠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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