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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경제와 세상]각자의 사상에서 해방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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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경향신문에는 중국 관련 기사 하나가 실렸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 34개를 싣고 중국 저장성을 출발한 화물열차가 18일 만에 런던 근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시진핑 정부의 ‘일대일로’ 사업의 하나인 육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였다. 뱃길을 이용했다면 2주가 더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뱃길보다 시간이 절반 정도 절약되고, 항공편보다 가격이 훨씬 싸다고 하니, 틈새시장을 개척했다는 의미부여는 가능해 보인다.

경향신문

그러나 ‘철도 실크로드’는 실크로드란 말이 주는 어감만큼 획기적인 사건이 되기는 어렵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이 아니라면 경제성이 별로 크지 않기 때문이다. 저장성처럼 바다에 인접한 경우에는 뱃길이 더 낫다. 상하이에서 말라카 해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거쳐 영국으로 가는 화물선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을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부른다.

이 배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만2000개를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로 치면 6000개에 해당하는 물량으로, 런던 근교에 도착했다는 화물열차의 170회 운행과 맞먹는다. 철도 실크로드가 뱃길보다 2주 정도 빠르다지만 해상운송이 가지는 이런 엄청난 ‘규모의 경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카라반(隊商)이 다니던 고대의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의 입구에 도달하는 데에만 1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었다. 그러나 거기서 짐을 일단 배에 싣기만 하면, 유럽의 어떤 도시든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유럽은 물길이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대륙이기 때문이다.

세계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유럽의 해안선은 다른 대륙보다 훨씬 복잡하다. 중국은 해안선이 5200㎞ 정도인데 유럽의 해안선은 지구둘레와 비슷한 4만㎞에 달한다. 바다로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라인, 엘베, 센, 다뉴브, 론, 볼가 강을 비롯해 평탄한 강들이 동서남북으로 흐른다. 스웨덴을 떠난 배가 발트해를 가로질러 드비나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드네프르강으로 갈아타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을 지나 흑해로 내려올 수 있다. 거기서 다시 보스포러스, 다다넬스 해협을 거쳐 지중해로 나오면 이집트든 이탈리아든 어디든 갈 수 있다.

접근성이 뛰어나고 신속한 이동이 가능한 유럽의 지리적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유럽인들에게 불안과 불확실성을 의미했다. 접근성이 좋다함은 언제라도 침입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한곳에 오래 정착하여 살기보다는 어디론가 늘 옮겨 다녔다.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아이디어가 생기면 탐구하고 실험해보고, 호기심이 생기면 직접 모험해 보는 기질이 길러졌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지역의 생각과 풍습을 받아들였다.

르네상스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유럽은 다른 대륙을 앞서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국을 포괄하는 서구문명으로 확대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이후 500년에 걸친 서구 번영의 핵심은 지리적 이점으로부터 길러진 이노베이션과 활기찬 적극성으로 요약된다. 한 마을에 정착하여 조상 대대로 산소를 지키며 농사를 짓고 옛글이나 읊조리던 문화와는 처음부터 성격이 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물의 이동에 필요한 지리적 이점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1년 이상 걸리던 실크로드가 18일로 단축된 데에서 보듯 운송수단이 계속 발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통신기술의 급진전으로 아이디어와 생각의 이동이 화물의 이동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아아! 지금 우리는 하루하루 답답한 시절을 살고 있다. 정치도, 경제도, 우리를 둘러싼 대외환경도 지금처럼 불확실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도전을 극복해낼 수 있을지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과거의 경제이론이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해결 방법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불확실성과 불안을 극복할 방법도 유럽이 그래왔던 것처럼 결국 이노베이션과 활기찬 적극성뿐이다. 기술과 상품의 이노베이션은 물론 제도의 이노베이션, 정책의 이노베이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생각에 얽매이지 말고 사고가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지녀왔던 신념과 사상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번쯤은 되돌아보아야 한다.

경제학자 조순 선생께서는 구순을 맞은 지금도 독서와 연구에 여념이 없으시다. 우리 경제의 진로를 찾으려 조언을 구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먼저 각자의 사상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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