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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영구기관’ 신봉자들이 밉지만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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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래] 박상준의 과거창

과거 과학문화 저변 보여준 발명가들

산업 지배, ‘대박’ 좇는 건 안타까울 뿐



한겨레

1940년대부터 차례로 나타난 발명 잡지들. 과거 발명은 대중 과학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며 유행하다 쇠퇴했지만, 최근에는 벤처 창업과 시민과학, 적정기술 문화의 흐름 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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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부터 시달렸다. 그중에 한두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또 나타나서 설계도를 한 꾸러미 내놓고는 덮어놓고 자기 의견에 동의하라는데, 소리를 칠 수도 웃을 수도 없어서 난감했다.”

물리학계의 원로였던 권녕대 전 서울대 교수가 생전에 밝혔던 일화다. 물리학자들을 찾아가 보증서를 요구하거나 자금을 대라던 이들. 바로 ‘영구기관’을 발명했다는 사람들이다.

과학기술이 전문 학자의 영역이라면, 발명은 시민과학의 이미지가 강하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특허를 내고 사업화하는 데에 학위는 필요 없다. 때로는 ‘영구기관’처럼 이 우주의 물리 법칙을 부정하려는 무리한 발상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발명은 대중 과학문화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 발명은 우리 과학문화의 시초였다.

한글로 된 최초의 대중과학 잡지는 1933년에 창간된 <과학조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처음에 ‘발명학회’의 기관지로 시작한 것이다. 발명학회는 1928년에 결성된 고려발명협회의 후신 격으로, ‘민족주의 발명 장려’를 표방하며 발명 진흥과 과학 대중화 활동을 폈다. 이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조선 민족의 독자적인 경제 산업 역량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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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상을 받은 자전거를 소개한 1968년 <발명>에 실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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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뒤에도 발명은 과학기술 대중화의 역할을 일정 부분 맡았다. 제호에서부터 그런 지향을 드러낸 잡지들이 계속 나왔다. 1948년에 <과학과 발명>(조선발명장려회)이, 1955년에 <과학발명>(과학발명신보사)이 창간되었다. <과학과 발명>은 금융 제도나 공업과 관련한 글도 수록하는 등 교양과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반면, <과학발명>은 천문학, 원자력, 핵무기, 신라와 고려의 과학기술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어 대중과학 잡지로서 손색없는 면모를 지녔다.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발명은 점점 교양과학보다는 산업과 경제 쪽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대학에서 전문인력이 계속 배출되고, 산업 전반에 걸쳐 시장 규모와 생산이 확대되면서 아마추어 일반인들의 발명 비중이 작아진 탓일 것이다. 1968년에 대한발명협회가 창간한 <발명>지에 이르면 정부에서는 상공부와 과학기술처가, 민간에서는 상공회의소와 무역, 금융 등 각종 경제단체 및 기업들이 대거 후원을 하고 있다. 이 잡지에 실린 제8회 발명품전람회 특집기사를 보면 전시품 대부분이 개인이 아닌 기업이 내놓은 발명품들이다. 학생과 일반인들의 발명품은 과학전람회에 선을 보였다.

오늘날 발명은 산업적으로 정보기술(IT)이나 바이오 분야 등등의 벤처 창업으로 맥이 이어지는 한편, 시민과학과 적정기술 등 민간의 자생적 과학기술 문화로도 흐름이 닿는다. 그런데 발명을 사업화를 전제로 하는 경제적 시각으로만 봐야 할까? ‘발명으로 부자 되자’는 프레임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들어 기계와 전기 등 새로운 과학기술 아이디어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이 과정에서 에디슨 같은 발명사업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토대가 갖춰지면서 발명이 돈이 된다는 신화가 탄생하고, 이것이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발명의 본질은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본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상을 하고 뭔가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존재다. 자신과 주변 환경 사이에 있는 어떤 대상물을 자기 뜻대로 바꾸고 개선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집념의 발명가들이란 그러한 인간 본성의 숱한 표현형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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