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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Why] 쇳물 아티스트… 세종대왕도 그를 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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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기자의 와일드 터치] 쇳물로 조형물 1만개 제작… 38년 주물 장인 박상규

조선일보

조형물 예술의 주연은 언제나 작가들이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도면을 따라 직접 쇠를 녹이고 붙여 턱밑 수염과 손등의 주름까지 구현해내는 장인들이 있다. 쇠를 진흙 다루듯 하는 박상규 공간미술 대표는 “예로부터 뛰어났던 우리나라 손재주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다”면서도 “하지만 우리 주물 예술계는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표가 대형 해골상을 주조하기 위해 만든 플라스틱 형틀 옆에 앉아 있다. /이천=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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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냉장고만 한 전기로(爐) 안에서 500㎏짜리 쇳덩어리가 뙤약볕 아래 아이스크림 녹듯 점액질로 변하고 있었다. 섭씨 1800도 쇳물이 뿜어내는 열과 빛으로 맨눈으로는 단 1초도 들여다볼 수 없는 화로였다. 쇠막대로 휘휘 저어진 시뻘건 쇳물이 모래 속 주물 틀에 다 빨려든 뒤에야 인부들은 하나둘 보호 장구를 벗었다. 인부들 가운데 박상규(53)의 얼굴은 화상 입은 듯 빨갛게 변해 있었고, 이마에선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박상규는 작가의 조형물 디자인을 쇠로 구현하는 주물(鑄物) 예술의 장인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과 국회 제헌의원 부조물, 완도 장보고 동상 등 국가와 지역을 상징하는 이 조형물들은 작가는 각각 달라도 주물은 모두 박상규의 손을 거쳤고, 7년 전 붕괴 위험에 처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수한 사람도 그였다. 이뿐 아니다. 전국의 예수상과 불상, 인물 동상 등 지금까지 만든 조형물이 1만점을 넘는다.

지난 17일 오후 박상규가 대표로 있는 경기 이천시 설성면의 '공간미술' 작업장을 찾아갔다. 그는 "금속 조형물은 아무리 디자인과 설계가 좋아도 주물이 나쁘면 작품 가치를 잃게 된다"면서 "작품의 생명을 결정하는 작업이 주물"이라고 했다. 열다섯 살 때 어깨너머 목격한 주물 공장과 공고(工高) 시절 본격적으로 익힌 주물과의 인연은 어느덧 38년이 됐다. 그는 "쇠로 눈썹과 지문까지 생생하게 만들어내는 것은 지금도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했다.

광화문 세종대왕도 그의 손 거쳐

―2009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했죠

"홍익대 조소과 김영원 교수 작품이었죠. 동상을 발주한 서울시에서 제대로 시설 갖춘 주물 공장에서 만들고 제안서도 제출하라고 했나 봐요. 그런 조건을 갖춘 주물 작업장이 드물다 보니 저를 찾았지요. 동상 옆에 전시된 해시계와 측우기도 당시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 동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청동으로 만든 거예요."

―가장 좋은 청동이라니요?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섞은 합금이죠. 하지만 주석 가격이 너무 비싸 주석을 적게 넣는 경우가 많아요. 주석을 넉넉히 넣어야 부식을 막고 작품도 오래 보존할 수 있죠. 국내 많은 청동상이 주석 함량 미달인 반면, 세종대왕 동상은 청동 빛깔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의 주석을 넣었습니다. 1000년을 버틸 수 있는 작품인 거죠. 우리 조상들이 만든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도 주석이 많이 들어간 청동 종입니다."

―그렇다면 황동은 무엇입니까.

"구리와 아연 합금을 황동이라고 해요. 아연은 가격이 싸고 약간 밝은 기운이 돌지만, 일정 시간 지나면 부식이 잘 되는 편입니다. 황동상이 청동상보다 저렴한 편이죠. 그래서 주석은 조금만 섞고 대신 아연 넣고 청동상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습니다(웃음)."

2010년 11월 14일 세종대왕 동상과 이웃한 이순신 장군 동상은 42년 만에 외출을 했다. 국내외 관광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이순신 장군 동상은 곳곳에 부식 현상이 나타나고 붕괴 위험에 놓여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동상 상태가 어땠습니까.

"1968년 제작 당시 우리나라에 구리가 많이 부족했나 봐요. 동상 전신을 금속 분석기로 살펴보니 합금이 6개가 들어갔어요. 원래 청동 한 가지로 해야 하는데 구리가 모자랐겠죠. 투구와 얼굴은 청동이라 상태가 좋았던 반면 팔은 황동, 가슴 쪽은 정체불명의 쇠로 분석됐어요. 당시 구리가 모자라 탄피를 녹여 썼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탄피가 황동이잖아요. 그리고 남는 철 다 때려녹여 넣다 보니 그런 동상을 만든 것이겠죠. 하지만 그것도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잖아요. 작가의 작품성을 존중해 다 고칠 순 없어 팔은 잘라내서 교체하고 다른 부분은 일부 보수만 했습니다."

―장군 동상의 칼집이 오른쪽에 있고, 칼이 일본도라는 등 논란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 극렬주의자가 많잖아요. 공장에 매일 전화해 칼집 왼쪽으로 옮겨 만들라고 난리예요. 하지만 장군이 직접 들고 싸우는 칼이 아니라 상징용 칼인데 오른팔에 있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고, 칼이 칼집 안에 있는데 일본도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요. 보수 기간 49일 내내 시달렸습니다."

―광화문에 가면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외국인들이 동상을 통해 우리나라 조형물 고유의 섬세한 곡선미와 선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카메라가 좋아져 당겨서 찍으면 미세한 선들이 잘 보입니다. 그런 선들이 오래 유지되려면 관리를 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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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대표가 지금까지 만든 금속 조형물은 1만점이 넘는다. 2009년 제작한 서울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왼쪽 사진). 국회의장석 뒤편에 있는 국회 상징 로고도 박상규 대표가 만들었다.(오른쪽 사진)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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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중국에도 동상 세워

―외국에 수출도 한다면서요.

"영국 벨파스트 항구에 높이 12m짜리 해마(海馬)상이 있습니다. 국제 공모를 통해서 영국 조소과 교수로 있는 독일인이 그 작품을 땄죠. 서울대 초청교수를 하다 영국으로 간 분인데 해마를 스테인리스로 만들고 싶어 했나 봐요. 유럽 다 뒤져도 스테인리스 장인을 찾을 수 없다면서 연락해 왔었죠. 무게만 6t이어서 두 덩이로 분리 제작해 배로 실어 보내줬습니다."

―다른 나라 조형물도 만든 게 있습니까.

"중국 사람들이 말을 좋아하나 보죠. 4~5m짜리 말 동상을 도시 한복판에도 세우고, 어떤 부자들은 자기 집에도 설치합니다. 북경·상하이·마카오 등 중국 각지에 말 동상 50개를 만들어 줬지요. 몇 년 전부터는 중국 측에서 일하자는 제의를 해요."

―어떤 제의를 받았나요

"중국 선양의 한 대학과 건설회사에서 현지에 공장을 차려주겠다고 해요. 연봉 3억원에 작품마다 일정액 개런티를 보장하겠다는 조건도 있고요. 중국엔 거리마다 동상이 많잖아요. 하지만 구리로 만든 동상이 아니라 섬유강화플라스틱(FRP)에 동상 색깔을 입힌 짝퉁이 많다는 겁니다. 중국이 잘살게 되면서 가난할 때 만든 이 동상들을 이제는 진짜로 바꾸고 싶은 거죠. 오래전 중국을 여행하다 100m짜리 청동 용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플라스틱 용 아닌가 싶네요(웃음)."

―계약을 체결했습니까.

"고민하다 거절했어요. 여기 포기하고 중국 가서 5년 일하고 돌아오면 돈 외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것 같았죠. 평생 일궈놓은 내 기술은 통째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고요. 그 사람들이 돈 거저 주겠습니까. 요즘은 필리핀이나 러시아에서도 의뢰가 옵니다."

―필리핀에선 무엇을 만들어달라고 하던가요

"30층 빌딩 높이와 맞먹는 77m짜리 예수상이에요. 필리핀 거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상을 만들어 자기 소유 산꼭대기에 설치한다는 겁니다. 작년 올림픽이 열렸던 브라질 리우의 예수상은 거기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편이죠. 그런데 저는 한국에서 만들어 배에 싣고 가겠다고 했고 그쪽에선 필리핀에 와서 만들되 핵심 기술자 제외하고 자기 나라 사람 부려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어요. 지금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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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대표는 2010년 붕괴 위험에 처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49일간 긴급 보수했다.(왼쪽 사진) 2014년에는 제헌국회의원 198명의 모습을 재현해 낸 부조물을 만들어 국회 중앙홀에 설치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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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꿈도 못 꾼 말썽꾸러기가 匠人으로

박상규의 고향은 전남 고흥이다. 농사짓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공부는 싫어하고 밤낮으로 친구들하고 놀러다녔다"면서 "공부 체질도 아닌 놈이 대학은 생각도 안 했고, 그래서 순천공고 갔다"고 했다.

―학교에서 주물을 처음 접한 겁니까.

"저보다 열다섯 살 많은 사촌형이 서울 신정동에서 주물 작업장을 운영했어요. 1978년쯤인가 중학교 다닐 때 그 공장에 놀러갔는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진흙으로 만든 주물 틀에 뻘건 쇳물이 들어가고, 잔심부름하면서 많은 걸 구경했죠. 그리고 공고 2학년이 됐더니 전공으로 주물반이 있는 겁니다. 주물과 인연이 벌써 4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쇠붙이가 아주 친숙하겠습니다.

"쇠로 만들어진 것은 다 잘 다룹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교감 선생님의 새 자전거 바퀴를 다른 학생 자전거의 헌 바퀴랑 바꿔놓았었죠. 선생님이 며칠 타고 다니다 나중에 눈치챘어요. 바퀴 크기가 약간 달랐으니까요. 그때 엄청 맞고 근신 징계 받았습니다(웃음)."

―고교 졸업하고 뭘 했습니까.

"일진금속이라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알루미늄 녹여 창틀 같은 데 쓰는 새시 만드는 공장이었죠. 알루미늄은 600도쯤 되면 녹고, 400도쯤 되면 물렁물렁해집니다. 젤리 같은 알루미늄을 압축기에 넣으면 새시 바(bar)가 쫙쫙 뽑힙니다."

―대기업엔 근무 안 했습니까.

"한 번 갔었죠. 전기 금속 재료 만드는 큰 기업으로 스카우트됐었습니다. 그런데 별 재미 못 봤죠. 명문대 금속학 박사 출신이 과장으로 왔어요. 전문가랍시고 이론은 많이 알지만, 전기 부품하고 알루미늄 녹여 만드는 합금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실제 제품 개발엔 전혀 도움 안 된다 이겁니다. 걸핏하면 현장 직원 무시하고, 우리가 개발해 놓으면 자기 실적으로 가로채고, 화딱지 나서 일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요?

"퇴사했죠. 당시 사촌형 주물 작업장 운영이 잘됐습니다. 형이 다른 회사 일 그만하고 도와달라고 해서 갔죠. 하지만 형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회사는 어려워졌고 저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전국 작업장을 돌아다녔어요. 이쪽 업계가 좁다 보니 '박상규' 하면 다 알아줬습니다. 그때 가깝게 지내던 한 교수님이 '실력 녹슬기 전에 빨리 네 작업장을 만들라'고 조언하더라고요."

―창업을 했습니까.

"2000년이었어요. 수중에 300만원밖에 없어 전세는 고사하고 월세 주기로 하고 경기도 김포 한구석에 150평짜리 돼지 막사를 빌렸죠. 압축기 같은 장비는 못 쓰는 것 가져와 수리했고, 가마는 벽돌하고 용접기 산소통 사다가 직접 만들었고요. 공장 구석에다 부부가 묵을 천막방 만들고 전기장판 깔았습니다. 직원을 어디서 구합니까, 마누라 일손이라도 빌려야죠. 작품 의뢰가 오면 재료비를 미리 좀 달라고 했어요. 재료 직접 사다가 만들어 나중에 납품하고 그랬죠. 그 무렵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어요. 납기 맞추려면 부부가 밤새도록 일해야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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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거친 조형물 중에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를 형상화한 작품도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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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은 많았나 봅니다.

"교수·작가들이 저한테 의뢰하면 작품이 제대로 나오니까 일감이 꾸준히 들어온 거죠. 스테인리스 주물 같은 건 제가 처음 시도했고요. 1년 남짓 눈알 팽팽 돌 정도로 일하니 공장 틀이 잡혔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구했고요. 하지만 쫓겨났어요."

―혹시 무허가?

"예. 워낙 후미진 곳에 있다 보니 시청에서 나중에 알았나 봐요. 군사보호지역에 이런 공장 차려놓으면 어떻게 하냐면서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땀으로 만든 피 같은 곳이지만 포기하고 다른 곳 알아보러 다녔죠."

"주물 예술계 검은돈 사라져야"

2008년 박상규는 김포 생활을 청산하고 이천시 설성면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5000평 부지에 일반 주조부, 정밀 주조부, 스테인리스부 등 부서를 갖춘 작업장으로, 대부분 무허가 사업장인 국내 주물 예술 업계에 이런 현대적인 작업장이 생긴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국내 주물 예술 현주소를 묻는 질문엔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성덕대왕 신종처럼 우리 조상들 쇠 다루는 솜씨는 세계 최고였어요. 그런데 요즘 우리 주물 예술은 온통 검은돈 만드는 수단으로 변질됐습니다. 전국 10여개 남은 주물 공장들마저 대부분 허름한 무허가 창고에서 신음하게 된 것도 작품성과 예술성 따지지 않고 돈 남겨 먹으려는 사람들의 책임이 큽니다."

―대체 검은돈이 어떻게 만들어진다는 겁니까.

"빌딩 지으면 의무적으로 조형물을 설치해야 합니다. 대형 조형물 상당수가 이 물량이죠. 가령 10억원짜리 작품을 만든다 칩시다. 그러면 디자인과 제작에 10억원을 모두 써야 하지만 돈이 중간에 다 새는 겁니다. 우선 건물주는 이 돈 일부를 비자금으로 챙깁니다. 건물주에게 작가를 연결해주는 브로커도 한몫 챙기죠. 그러다 보니 신진 작가와 직접 조형물을 만들어야 하는 주물 공장엔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내려옵니다. 주물쟁이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비싼 재료 덜 넣고 대충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100년은 고사하고 얼마 안 가 동상들이 썩고 문드러지는 겁니다. 어떤 작가들은 국내 주물 가격도 비싸다고 중국 가서 만든다더군요. 문화재 보수 작업도 한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쪽은 뭐가 문제입니까.

"문화재 수리하면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옵니다. 이 돈 챙기려고 안 고쳐도 되는 작품 고치는 거예요. 철로 만든 불상에 금박 입히는 경우도 봤죠. 작품 망가지건 말건 보수비 많이 청구하려고 그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후손들이 그 작품 원형 그대로 모습을 보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분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수 관리만 해야 하는데 돈 생기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부 지원금이 실제 필요한 곳엔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줄줄 새고 있는 것이죠."

―문화재 보수 의뢰도 들어오지 않나요.

"안 해요, 안 해. 보면 한심할 때가 너무 많아요."

―후계자는 키우지 않습니까.

"나와 달리 머리 좋은 젊은이가 작심하고 배우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기꺼이 가르쳐줄 것이고요. 하지만 그런 청년 아직 만나지 못했네요. 고단한 직업이고 극한의 직업이죠. 주물 예술이 문화 분야에서도 가장 천한 분야 아닙니까. 정부가 밀어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나서기로 했어요."

―무슨 구상이 있으신 모양인데.

"경기 안성에 1만2000평 규모 주물 작품 전시관을 짓고 있죠. 그동안 모아놓은 작가들 작품도 갖다놓고 교육관과 체험관 만들어 젊은 장인들 양성하려고요. 그런 곳에 외국인들 불러 우리 주물 예술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후대에 남겨놓고 싶은 작품 같은 것이 있나요.

"당연히 있지요. 파리 하면 에펠탑이고 에펠탑 하면 파리라는 대답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도 그런 조형물 한 개쯤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한국 전통 곡선을 제대로 살린 섬세한 탑을 만들고 싶습니다. 높이 20m, 대략 건물 8층짜리 규모이지만, 10㎝마다 조각조각 붙여서 탑 한 개를 완성해 보려고요. 디자인부터 주물까지 이 '공간미술'에서 만들 겁니다."

―미대 교수나 유명 작가들 사이에서 장인이 왜 예술가 행세 하느냐는 소리 안 합니까.

"그런 얘기도 나오죠. 그럼 대답합니다. 돈만 있었으면 미대 졸업장 서너개는 땄을 거라고(웃음). 다른 분야와 달리 주물 예술은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작품을 쇠로 구현할 수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로댕 조형물은 일본의 한 주물장에서만 작업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전 세계 작가들이 줄지어 찾아오는 주물 명소가 됐으면 좋겠어요."

작가들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들어오던 박상규는 수년 전부터 '공간미술'에 디자인팀을 운영하고 있다. 작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4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의 말은 거침없었고 자신감 넘쳤다. 쇳물이 만들어놓은 팔목과 손등의 수많은 화상 자국들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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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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