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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밥상 위의 세계(8)]금가루 커피부터 보쌈까지··아라비안 나이트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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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 한국문화원에서 지난 9월6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아부다비 지사가 주최한 쿠킹클래스에서 알라누드 알하마디(29)가 백김치 재료로 쓰일 피망을 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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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은 ‘랩(wrap)’이란 뜻이에요. 보쌈은 ‘뭐든 싸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죠.”

보쌈이 영어를 만났다. 그것도 중동 한복판에서. 9월 6일 오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식 요리교실에 여러 나라에서 온 수강생 15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날 실습할 요리는 ‘송아지뱃살 보쌈’과 ‘백김치 샐러드’였다. 수강생들의 평균 나이는 28.4세.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골고루 모였다. K팝과 한국 드라마 등 한류를 좋아하는 10대 소녀들이 대부분일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UAE, 예멘, 오만, 이집트 등 중동·북아프리카 출신 10명 외에도 프랑스인 20대 부부와 러시아 출신 30대 주부, 필리핀에서 온 20대 미혼남성까지 보쌈 요리를 배우러 왔다. 다양한 생김새와 옷차림만 봐도 ‘국제도시 아부다비’라는 말이 실감났다. UAE 인구 590만여명 가운데 UAE 국적자 ‘에미라티’는 11.3%, 9명 중 1명뿐이다. 인도·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출신이 50%를 차지한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낮아진 경제장벽을 넘어 중동의 석유 부국으로 몰려들듯, 오늘 우리 밥상 위에도 낮아진 무역장벽을 넘은 세계의 식재료들이 올라온다. 반대로 우리 밥상 위의 음식과 요리도 세계의 밥상에 오른다. 다국적 다인종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 동시에 ‘먹거리’에 까다롭다고 알려진 무슬림들의 밥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아부다비를 찾았다.

■한국 셰프의 요리 수업

요리 수업은 오후 4시2분에 시작했다. 한국은 한창 일할 시간이지만 아부다비의 관공서나 학교, 기업은 보통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 더울 땐 최고기온이 50도까지 육박하기 때문에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3시면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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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한식 쿠킹클래스에서 김지훈 셰프(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강생들이 백김치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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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는 시내버스 정류장에도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 냉방시설이 갖춰진 육교도 있다. 중앙 냉방을 하는 최신식 건물은 입주자들에게 ‘장기간 집이나 사무실을 비울 때 냉방을 끄지 말라’고 공지하기도 한다. 언뜻 기름 걱정 없이 전기를 펑펑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물의 어느 한 곳만 뜨거워지면 벽에 곰팡이가 슬어 빌딩 관리에 애를 먹고 냉방 효율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사시사철 시원한 아부다비의 근무시간은 세계 표준과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를 타고 다니던 유목민이 천년 넘게 이어온 생활문화가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식문화도 근무 시간표에 맞춰진다. 에미라티들은 퇴근 후 늦은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 저녁은 가볍게 먹는다. 식당가도 이에 맞춰 메뉴를 준비한다.

올해 들어 다섯번째 요리교실을 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아부다비 지사는 이날 수업을 3시30분에 시작한다고 공지했다. 그러나 이날도 어김없이 32분 늦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참석을 못하면 못하는 대로, 무슬림 특유의 ‘인샬라(신의 뜻대로) 문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투덜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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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부부 실뱅 조르조와 줄리 조르조가 아부다비 한식 쿠킹클래스에서 직접 만든 송아지 뱃살 보쌈 요리를 접시에 담아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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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교실의 선생님은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인 두바이에서 왔다. 두바이 W호텔 아시안레스토랑 ‘나무(NAMU)’의 김지훈 수석 셰프였다. ‘막심 킴’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는 수업 내내 “간단하죠?” “쉽죠?” “재밌죠?”라는 말을 반복했다. 생소한 한식을 편하게 느끼게 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수강생들에게 한식은 이미 생소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디니(40)는 위성TV로 본 방송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보쌈을 보고 꼭 먹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모로코인 수마이아 아마네(28)는 보조 셰프에게 “한국 영화에서 본 김튀각을 맛보고 싶다”며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관심만 있으면 웬만한 한식 조리법은 구글 검색으로 쉽게 접할 수 있고 유투브에도 요리 동영상이 넘쳐난다.

수업은 배추를 절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통배추를 식칼로 갈라 배춧잎 하나하나에 소금을 뿌린다. “자, 여기 제가 2시간 전에 미리 절여놓은 배추가 있습니다. 여기서 배운 대로 집에서 만드시면 됩니다.”

막심 셰프는 속재료로 쓰일 무, 당근, 피망, 고추를 길쭉길쭉 썰었다. 백김치 국물을 내기 위해 설탕, 소금, 마늘, 양파, 생강, 액젓 등을 믹서에 넣고 갈았다. 한국 같으면 다진 마늘을 썼겠지만 ‘손쉬운 한식 요리법’을 가르치는 막심 셰프는 “한번에 모두 갈아버리세요”라고 알려줬다. 식재료 모두 아부다비의 대형마트나 한국 식료품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요르단 국적의 마나르(21), 마르완(19) 남매는 정성스레 속을 넣은 백김치 두 포기를 곱게 말아 밀폐용기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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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실뱅 조르조가 아부다비 한식 쿠킹클래스에서 조리된 송아지 뱃살고기를 접시에 담은 뒤 쌈장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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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요리는 간단해야 했다. 다양한 식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제국 문명과 만나기 전까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았던 베두인들의 요리 문화는 냄비에 모든 재료를 넣고 끓이거나 양·염소 고기를 통채로 불에 굽는 정도였다.

■무슬림의 나라에서 보쌈을 맛보다

다음 차례는 주 요리인 보쌈. 무슬림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 대신 송아지 고기를 이용했다. 막심 셰프는 “여러 고기 부위를 놓고 실험을 해봤지만, 운동량이 적은 어린 송아지의 뱃살만큼 보쌈고기의 질감에 가까운 음식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레스토랑에서 110디람(약 3만5000원)에 파는 송아지 뱃살 보쌈의 조리법은 간단했다. 맛을 돋우고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재료를 솥에 넣고 고기가 잠길 정도로 물을 넣어준 뒤 1시간30분 가량 푹 삶는다. 송아지 고기 1㎏, 마늘 10톨, 작은 생강 1개, 양파 반개, 소금 1티스푼, 후추 1큰술, 된장 1티스푼. 모두 아부다비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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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외곽 무사파에 있는 쇼핑몰인 달마몰에서 한 청소년이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중동의 여러 산유국에서는 육식과 가공식품 위주로 식단이 구성되고 이주노동자들이 육체 노동을 대체하면서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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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삶아 놓은 고기는 바삭한 질감을 내기 위해 전기 로스터로 한번 구워준다. 사막 위에 지어진 아부다비는 소방법이 엄격하다. 요즘은 바닷물을 담수 처리한 수돗물이 가정에 풍족하게 공급되지만 과거 물이 귀했던 시절의 흔적이 법령에 남아있다. 이 때문에 음식점에서도 가스 조리 시설을 설치하려면 관청을 들락날락하며 따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가스레인지 대신 전기 조리기구를 쓴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수업을 듣던 프랑스인 실뱅 제르조(29)는 한식에 도전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에티하드항공 승무원인 그는 비번인 날마다 요리하는 게 취미다. 도서관에서 세계 요리 책자를 보다가 불고기에 매력을 느껴 집에서 만들어 본 적 있다고 했다. 실뱅은 “요즘은 고소한 참기름이나 간장 같은 동양 소스에 특히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배추 썰기를 어려워하는 부인 줄리(27)를 가르칠 정도의 솜씨를 선보이던 그는 차곡차곡 쌓은 깻잎 위에 보쌈 고기를 얹더니 접시 옆에 쌈장을 멋들어지게 뿌려 요리를 차려냈다. 서양 요리의 시각적 효과를 보쌈에 접목한 것이었다. 쌈장도 인기였다. 쿠킹 클래스 참석이 벌써 세번째인 주부 스베틀라나 지(37·러시아)는 종이컵에 실습용으로 떠놓은 쌈장을 비닐랩으로 씌워 가방에 챙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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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의 두바이몰에 있는 대형마트 웨이트로즈 내부의 돼지고기 전용 코너 ‘포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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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들은 완성된 보쌈 요리를 깻잎과 상추에 싸서 서로 먹여주며 품평을 했다. 고기와 채소를 한번에 먹는 한국식에 다들 엄지를 치켜세웠다. 원체 고기를 많이 먹는 중동에서도 UAE 같은 부유한 산유국 사람들은 갈수록 살이 찌고 있다. 가공식품이 식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야외활동이 적은 데다, 육체 노동이나 가사·육아 등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이집트 아인샴스대 의대가 지난 8월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계에서 비만 인구 비중이 높은 10개국 가운데 6곳이 중동·북아프리카 국가였다. 체질량지수(BMI) 25이상인 과체중·비만 인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쿠웨이트가 42.8%로 가장 높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35.2%로 그 다음이었다.

UAE도 3명 가운데 1명(33.7%)이 과체중·비만으로 뚱뚱한 나라 순위 6위를 차지했다. 이 나라들에서는 비만으로 인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 성인병 환자가 늘어나면서 ‘살빼기’가 보건당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한국중동학회 회장인 김종도 명지대 교수는 “프랑스가 할랄 푸아그라와 무알콜 샴페인처럼 무슬림에 맞춘 식음료로 중동에 진출했듯이, 비빔밥과 김밥 등 채소 비중이 높은 한국 음식도 적절히 변형하면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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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시내 전경. 도로 양쪽으로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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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권에서 돼지고기를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슬림에게 돼지고기는 하람(금기)이지만 온갖 사람들이 몰려드는 아부다비나 두바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웬만큼 규모가 큰 마트에는 ‘비무슬림들을 위한 돼지고기 코너’가 있다.

두바이에 있는 828m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할리파 옆, 세계 최대의 쇼핑몰인 두바이몰의 영국계 마트 ‘웨이트로즈’에 들렀다. 돼지고기 코너의 입구는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매장 내부는 한국의 편의점 서너개는 들어갈 만큼 넓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온갖 돼지고기 부위가 진열돼 있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스페인산 돼지귀는 1㎏에 20.95디람(약 6700원), 케냐산 돼지족발은 ㎏당 11.95디람(약 3800원)에 팔린다. 고기뿐 아니라 햄·소시지 같은 돈육 가공식품, 시즈닝에 돼지고기 성분이 들어간 스낵류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금커피’와 보톡스

한국에서는 두바이가 화려한 중동 도시의 대명사이지만, UAE의 맏형 아부다비를 따라가지 못한다. UAE는 ‘에미르’라는 통치자가 다스리는 7개 에미리트의 연합체다.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에미르가, 총리는 두바이 에미르가 맡는 것이 관례다. 경제적으로도 아부다비가 이 나라의 주축이다. UAE는 하루 산유량 282만 배럴 가운데 250만 배럴을 수출하는 세계 4위의 석유 수출국이다. 그 산유량의 94~95%를 아부다비가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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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에미리츠팰리스 호텔 르카페에서 파는 에미리츠팰리스 카푸치노. 우유 거품 위에 금가루가 뿌려져 있어 골드커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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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이 거의 나지 않는 두바이는 초고층 빌딩과 금융 허브 건설을 외치며 앞서 달려갔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그 때 두바이를 살려낸 것이 아부다비였다. 아부다비의 구제금융으로 기사회생한 두바이는 ‘부르즈두바이’의 이름을 완공 때는 ‘부르즈할리파’로 바꾸는 것으로 상징적인 보답을 했다. 아부다비 에미르인 셰이크 할리파 빈자이드 알나하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두바이를 반면교사 삼은 아부다비는 환경 친화적인 개발,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험하고 있다. 석유의 나라에 국제재생에너지지구(IRENA) 본부를 유치했고, ‘탄소 배출 제로’를 표방하는 마스다르 시티도 짓고 있다. 사막이던 거리에는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심어졌다. 길 밑에 물이 공급되는 호스를 깔아 인위적으로 만든 조경이긴 하지만 삭막한 빌딩 숲만으로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인도·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농담이 있다. 자동차 운전자가 사고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핸들을 꺾어야 할 때 가로수와 낙타와 이주노동자가 앞에 있다면, 이주노동자를 치는 게 가장 피해를 적게 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낙타, 그 다음이 가로수라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 나무를 키우려면 그만큼 돈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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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무사파지구 달마몰 1층에 있는 한국 식품 안테나숍에 한국산 차 제품이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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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특유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아부다비는 먹을거리에서도 사치를 추구한다. 궁전으로 계획됐다가 호텔로 바뀐 에미리츠팰리스호텔 카페에서는 24K 순금 가루를 우유 거품 위에 뿌린 ‘골드커피’를 판다. 가격은 50디람(약 1만6000원). 우유가 아닌 낙타유로 만든 거품을 얹은 커피 ‘카멜치노’도 인기다.

개발이 한창인 아부다비 외곽 무사파 산업지구를 찾았다. 대형 쇼핑몰인 달마몰 1층에는 지난 6월부터 문을 연 한국 식품 안테나숍이 있다.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 인기 품목을 예측하려고 식제품 시식·시음행사를 자주 연다. 쇼핑몰 복도에 차려진 1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32종의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매장을 지키던 필리핀인 직원 샤리나 아디자스(21)는 “국적보다 연령대별로 선호하는 식품 차이가 뚜렷하다”면서 “중장년 남성들은 홍삼 제품에 관심이 많고, 청소년들은 초콜릿 과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맵디 매운 불닭볶음면을 시식해 보고 “더 매운 건 없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아디자스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떡볶이다.

중동 진출을 노린다며 무슬림과 할랄만 염두에 둘 일은 아니다. 통계 상에는 UAE 인구 가운데 미국·유럽·동아시아인이 8%로 돼 있지만, 아부다비 시내 식당이나 호텔 로비에서 접한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절반 이상은 아디자스처럼 필리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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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에 있는 퓨전 한식당 김치킨에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손님의 대부분이 필리핀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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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쿠킹 클래스에도 제리코 디아노(29)라는 필리핀 남성이 있었다. 두바이에 4곳, 아부다비에 1곳의 지점이 있는 퓨전 한식당 ‘김치킨(KIMCHIKIN)’의 손님은 80%가 필리핀 사람이었다. 불고기와플 같은 퓨전 한식과 한국식 양념치킨을 파는 음식점은 한국인이나 에미라티보다 필리피노가 월등히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안테나숍 진열대 한 켠에 놓인 젤리에는 돼지껍질에서 추출한 젤라틴이 포함돼 있다. 아디자스도 “이 부분은 미처 알지 못했다”면서 “한국인 사장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음식 뿐 아니라 의약품의 캡슐 등에도 쓰이는 젤라틴은 무슬림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성분이다. 얼굴 주름을 펴주는 보톡스는 전 세계의 많은 노인과 여성들의 사랑을 받지만 아랍권에서는 젤라틴 성분이 들어있다는 소문 탓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알아인 저택의 에미라티 밥상

아부다비의 에미라티들은 어떤 밥상을 차려 먹을까. 한류팬 모임에서 소개받은 고등학생의 집을 찾아 아부다비 에미리트 제2의 도시 알아인으로 향했다. 아부다비 도심에서 동쪽으로 160㎞ 떨어진 곳이다. 오만과 국경을 맞댄 알아인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제벨하피트 사막공원과 무덤군 등이 등재된 유서 깊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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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제2의 도시 알아인에서 한국인을 위한 만찬을 베푼 고교생 샤마 파에드가 살고 있는 2층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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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는 으리으리한 집들이 즐비했다. 전화로 알려준 주소지를 찾아 가니 건물만 700㎡(약 212평)쯤 되는 2층 저택의 문이 열린다. 주차공간만 5개. 현관에서 집주인의 딸 샤마 파에드(17)와 동갑 친구 미라 탈랄, 샤마의 이모 아이샤 모하메드(22)가 기다리고 있었다.

샤마가 먼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와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금으로 된 축음기가 옆에 놓여 있는 응접실의 기다란 소파에 앉아 손님을 위해 준비한 식전 ‘맛보기’ 음식을 대접받았다. 참깨가 뿌려진 도넛 같은 리키마트와 찢어먹는 얇은 빵 코브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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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에 한국인을 초대해 준 샤마 파에드의 아부다비 알아인 집 응접실에 금으로 만든 축음기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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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스런 응접실을 둘러보는데 12살 남동생 술탄 파에드가 2층에서 뛰어내려왔다. 보수적인 이곳 무슬림은 손님을 맞을 때도 ‘남녀유별’의 전통이 있지만 외국 손님은 예외라며 여성들이 맞았다. 그래도 동성의 손님을 맞을 사람이 있어야하기에 술탄이 나온 것이었다. 술탄은 코를 부비는 전통 인사를 한 뒤 커피포트에 든 아랍식 커피를 따라줬다. 커피를 따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오른손으로 잔을 맞잡았다. 한쪽 벽면에는 알록달록한 접시들이 걸려 있었다. 가족 여행 때나 아버지의 출장 때 터키 이스탄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스페인 세비야,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밀라노 등에서 사온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니, “비밀”이라고 했다. 정보기관 같은 곳에서 일한다는 것만 알 뿐 구체적으로 아버지가 하는 일은 잘 모른다고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또다른 친구 마리암 아메드가 왔다. 이들은 내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다. 한국말 실력이 가장 뛰어난 미라는 “실은 우리 내일 시험이 있어요”라고 했다. “시험은 진짜 싫어요”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은 한국의 또래들과 영락없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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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알아인에서 한국인에게 만찬을 베푼 집 주인 아들 술탄 파에드(왼쪽)와 술탄의 누나 친구 미라 탈랄이 현지 음식과 한식이 차려진 식탁을 앞에 놓고 식사를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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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통 음식인 하리스(harees)와 데리드(thereed)가 메인 요리였다. 멀리서 온 손님을 배려해 한국 음식도 올렸다. 알아인에서 유일한 한식당 아카시아에서 주문한 떡볶이, 김밥, 계란말이, 나물 반찬. 먹고 싶은 음식을 접시에 떠서 다시 응접실로 가져가 먹는 뷔페식 만찬이었다. 아랍 전통 상차림도 한식처럼 코스 없이 한꺼번에 차려 낸다.

하리스는 밀가루와 다진 양고기, 소금을 물에 넣고 푹 끓여 반죽같이 만든 다음 밤새 식혀 만든다. 조리법은 간단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매일 먹는 음식은 아니다.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입 안에서 금방 녹아 무른 술빵이나 푸딩같은 느낌이었다. 쌀가루와 다진 닭고기를 끓여 좀 더 걸죽하게 만든 닭죽 같은 맛의 하리스도 상에 올라왔다.

하리스는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을 해야 하는 라마단 기간, 저녁 식사 때 자주 먹는 음식이다. 부드럽고 순해 낮 동안 비어 있던 위를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미라티들은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이나 명절인 이드알아드하(희생제) 때에도 하리스를 차린다. 어머니가 전날 밤부터 준비해 만들었다고 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보수적이라서 남자 손님에게 인사드리기는 어렵다고 하셨다. 맛있게 드셨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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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인 집에 저녁식사로 차려진 에미라티 푸드(현지 음식).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리스, 데리드, 하리스, 코브즈와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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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드는 큼직하게 썬 닭고기나 양고기에다 감자, 토마토, 호박 따위의 야채와 후추와 커민 같은 향신료 가루를 듬뿍 쳐 푹 끓인 음식이다. 인도 커리와 비슷하지만 얇은 빵인 리가그(rigag)를 층층이 쌓고 사이에 건더기들을 넣는 점이 다르다.

■밥상은 넓고도 깊다

중세 이전부터 걸프는 인도, 페르시아와 지중해를 잇는 향료 무역의 중심지였다. 음식 문화에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한 데 모아 푹 끓여 만든 심심한 유목민 조리법이 향신료를 만나 맛깔스럽게 다시 태어났다. 미국 저널리스트 톰 스탠디지는 <식량의 세계사>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도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인도양에서 수입된 향신료를 지중해로 운송하는 육로를 따라 시리아까지 여러 번 다녀왔다”고 썼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상인을 영예로운 직업으로 여긴다.

상인들의 교류와 이들이 가져온 먹을거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문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인구의 절반인 남아시아 노동자들이 먹는 음식에 들어가는 고수, 계피, 정향, 심황같은 향신료가 에미라티들의 밥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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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탈랄(왼쪽)과 마리암 아메드(가운데)가 알아인에 있는 동갑내기 친구 샤마 파에드(오른쪽)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접시 위에 놓인 김밥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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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한참 하고 있는 도중에야 이 집에서 혼자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고 긴 겉옷 아바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 맨발이었다. 얼른 신발을 벗고 돌아와 “한국 문화와 비슷하다”고 했더니, 샤마는 웃으면서 “사극 드라마에서 봤는데 한국도 예전에는 여자들이 바깥 나들이할 때 히잡 비슷한 걸 쓰고 다니더라고요”라고 답했다.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무슬림 여성의 몸을 가리는 옷들이 이들을 옭아맨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쿠란에서도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옷 밖으로 드러나는 손에는 헤나 문신을 새기고, 속옷은 서구 여성들보다 더 화려하게 입는다고 한다.

쇼핑몰이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의 히잡은 여러 빛깔이었다. 중동 여성 패션 시장은 이미 샤넬, 돌체앤가바나 등 패션 브랜드들이 무슬림 디자이너들을 채용해 만든 화려한 디자인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이기도 하다. 식품(food)·금융(finance)과 함께 3F로 불리는 패션(fashion)은 구매력이 높은 중동 지역에 진출하려는 외국 자본의 공략 대상이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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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시내 커피숍에서 다양한 색깔의 히잡을 쓴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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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의 여학생들은 식사 중간에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메신저 앱인 스냅챗을 한다고 했다. 기술의 발달이 고유의 문화를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문화에 녹아들기도 한다. 요즘 무슬림이 타는 차량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에는 이슬람 성지 메카의 방향 ‘키블라(qiblah)’를 알려주는 기능이 포함돼 있다.

3시간여에 걸친 만찬이 끝나자 이들은 부크르라는 아랍 전통 향을 피웠다. 육식 비중이 높은 음식문화와 서구인들에 비해 가까이서 대화하는 풍습 때문에 향수 문화도 발달했다.

매일 차려지는 자그마한 밥상 위에는 넓은 세계가 담겨 있다. 그 밥상 아래에는 긴 역사를 이어 온 그들만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 밥상의 깊이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한식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밥상 주변의 이익만을 탐해 나라를 뒤흔든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금기시하는 식탐의 죄까지 범한 사람들이다.

아부다비·두바이·알아인|

<글·사진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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