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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취재파일] "정부가 안 보인다", "책임질 주체가 없다", "IMF 때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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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과잉으로 위기 직면한 업종 구조조정…정부와 기업, 쓴소리 귀 기울여라

경기침체와 불황을 언급한 지도 꽤 됐습니다. 3% 성장은 이제 물 건너간 지 오래, 주요 연구소와 전망기관들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2%대 중반까지 내려잡고 있습니다. 경기상황은 여러 지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년실업률이 치솟고 장기 백수 비중도 외환위기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실업의 질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법원의 파산관리 기업 규모는 IMF 외환위기 수준에 육박했고, 신용등급이 강등된 기업 수도 외환위기 이후 최대를 기록하는 등 기업들의 재무제표도 열악합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내는 상장사가 셋 중 하나이고, 그런 상황이 3년 이상 지속된 좀비 기업이 15%에 육박한다는 건 연명하는 기업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그 기업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경쟁력을 상실한 한계기업이 늘어날수록 생산적인 스타트업이나 가능성 있는 분야로 흘러가야 할 금융기관의 돈이 엉뚱한 곳에 묶여있어 새로운 성장 동력 위주로 산업 생태계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조선, 해양, 철강, 석유화학, 건설, 이 5개 분야는 정부가 '5대 취약업종'으로 지정하고 구조조정을 촉구하고 있는 업종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온 이 업종들은 전 세계적 경기침체와 저성장 기조 속에 수요가 줄면서 공급 과잉으로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저가 공세로 시장을 교란시킨 중국은 이제 기술력도 많이 따라와 우리 업체들을 더 위협하고 있습니다.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없다면 결국 한진해운의 법정관리행, 이로 인한 물류대란 사례에서 보듯 부도 위기에 직면해서야 구조조정 도마에 오르게 되고, 그러면 산업 측면의 고려보다는 채권단 위주의 금융의 논리가 주도한 구조조정으로 전개돼 상당한 후폭풍을 동반하게 마련입니다. 구조조정의 타이밍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정부도 조선, 해운의 부정적인 전철을 다른 업종이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선제적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구조조정 협의체를 구성해 업계와 민간 컨설팅 업계의 의견을 조율해 대안을 마련했습니다. 정부가 내놓은 구조조정 방안은 공급과잉에 직면한 설비나 생산량을 업계 자율로 감축하도록 유도하고, 경쟁력이 있는 부분은 고부가가치화해서 R&D 투자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하지만 공급과잉이 심하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이걸 어떻게 도출할 수 있겠느냐 하는 '방법론'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업체끼리 자율로 감산을 유도해나가라고 하지만 사실 현실에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업체마다 다양해 원활한 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하기만은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부분에서 정부의 구체적인 역할, 지원 범위, 향후 어떻게 이해관계를 조율할 것인지가 대책에서 빠져있어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전 세계적 보호무역기조 속에서 정부가 지나치게 사업재편에 개입하는 모양새를 보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통상 마찰이 신경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실제로 철강 분야에서 '통상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은 최근 우리나라 정부의 업계 지원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실성 측면에서 볼 땐 업계 자율에 맡겨도 될 사안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좀 더 고민이 필요했을 것이란 아쉬움입니다.

구조조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경쟁력 없는 부분을 정리해 결국 기업을 살리기 위함이 구조조정의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정리하고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조와의 갈등, 해당 업체가 위치한 지역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정치권의 반발, 채권단과 주주 등 이해관계는 더 복잡해지고 조율하는 작업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만큼 뚜렷한 구조조정의 원칙이 드러나지 않고 일관성이 없다면 설득과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IMF 직후 부도에 직면한 기업들을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을 해낸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굉장히 큰 고통을 겪었지만 하이닉스, 기아차 등 위기의 기업들이 정상화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보다 지금이 구조조정 측면에선 더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전 세계가 수요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재무적인 위기에 빠진 문제여서 그 부분을 지원해주면 다시 생산해 물건을 팔고 정상화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단순히 돈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해운과 조선 등의 사례에서 봤습니다.

게다가 3~4년 전부터 공급과잉 업종에 대한 문제가 지적돼왔는데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구조조정하기에는 최악의 시기라는 '정권 말'이 돼서야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금 국회상황을 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기업들도 각성해야 합니다. 경영에 실패하면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아니라 버티면 되겠지 하는 '대마불사'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진해운 사태에서 보듯 설마 법정관리로 밀어 넣을까 하는 대주주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처는 많은 경제주체들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어떻게 구조조정의 원칙을 잡고 현명하게 추진할 수 있을까요? 조언을 듣기 위해 각계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분들을 두루 만나 뵈었습니다. 짧은 방송뉴스에 한 문장만 담기엔 너무 아까운 좋은 말씀들이 많아 정리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 이필상 서울대 교수(전 고려대 총장) 세 분 모두 IMF 이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진행돼온 크고 작은 구조조정 노력들, 성공사례와 실패사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부분들에 대해 진솔한 조언을 들려줬습니다.

공통적으로 이런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구조조정의 방향, 구조조정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해야 한다. 이게 분명해야 설득할 수 있고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다. 전문가가 정말 정교한 전략전술을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뚜렷해야 한다. 현재 뚜렷한 컨트롤타워가 실종돼있다."

"예전에는 국내 요인이 어려웠을 때였지만 지금은 글로벌 시장 자체가 어렵다. 이 시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이뤄내지 않으면 미래가 불투명하다."

"미시적인 개별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을 어떻게 끌고 갈지, 미래 성장 동력으로 가져갈지 아니면 축소시킬지 거시적인 산업정책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채권단도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서 이 기업을 꾸준히 모니터링해서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

"구조조정 전략을 짤 때 산업 경쟁력 뿐 아니라 금융권 부실문제, 지역경제의 어려움, 실업자 지원 등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구조조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기업이나 채권단 등 이해관계자가 배제돼야 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성장가능성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구를 만들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정부는 비전을 제시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손에 피묻힐 사람이 필요한데, 추후에 성공과 실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정책적 추진을 가지고 결과를 놓고 책임을 묻거나 징계하거나 한다면 누가 뚝심 있게 정책을 추진하겠나.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을 경계해야 정부의 책임지는 자세, 결단력을 이끌 수 있다. "

"컨설팅 업체에서 컨설팅을 받아 구조조정 한다는 것엔 한계가 있다. 컨설팅 업계는 수주를 받는 것이어서 수주하는 기업의 의향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인 구조조정이 되긴 어렵다. "

"산업구조의 발전은 상당히 동태적이다.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과거에 우리를 먹여 살린 업종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는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이 시급하다."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기업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기업 부실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소재도 분명히 해야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 힘이 생긴다. "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들이 한번쯤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인터뷰를 공유합니다.

[정호선 기자 hosu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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