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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운좋게 살아남아 ‘여혐’에 맞서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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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남역 살인사건’뒤 뼈아픈 자각

광장에서 ‘길거리 괴롭힘’ 고발하고

‘페미니즘’ 자발적 소모임도 활발

여성 ‘성적 욕망’ 말하는 축제도

전문가들은 미디어 폐해 비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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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일 열리는 ‘하는 여자 페스티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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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영문도 모른 채 욕을 얻어먹고, 협박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모든 여성들이.”(지난 21일 열린 ‘2016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 대회 낭독문 일부)

메갈리아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성 혐오’에 맞서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눈에 띈다.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라던 뼈아픈 자각이 원동력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 혐오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타자화, 직설적으로 말해 여성 멸시라고 정의한다. ‘여자니까 봐줄게’, ‘몸을 소중히 다뤄야지’ 같은 말들도 모두 여성혐오일 수 있는 이유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차별과 성희롱 경험들이 공유되고, 전문가들은 여성혐오를 강화시키는 드라마·영화·뉴스를 비판하고 나섰다. ‘성’을 주제로 한 페미니즘 축제도 열린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이, 곧 ‘여혐’과 싸우는 최전선이다.

나는 고발한다, 당신의 범죄를 “전 초딩 때 슴튀(가슴을 만지고 도망치는 행동) 많이 겪었어요. 중고등 때는 버스에서… 버스 타는 게 무서웠어요”, “만지는 것도 흔하고 성기노출 진짜 심하게 흔한 것 같아요”. 실시간 공개 대화방에 쉴 새 없이 경험담이 올라왔다.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2016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 대회’에선 일상 속 성적 괴롭힘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결의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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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2016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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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직접 낭독한 피해 사례는 더욱 구체적이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내 엉덩이를 주무르고 갔다. 너무 분하고 수치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보복이 두려워 며칠 만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내 애인에게 ‘집에 잘 좀 데려다주라’고 했다. 결국 범인은 못 잡았다. ‘별 미친놈 만났네, 다음부터는 조심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정말 더한 짓을 당했어야만 위로받을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왜 올해 ‘길거리 괴롭힘’에 주목했을까. 상담소 쪽은 “강간만 성폭력이 아니다. 안전할 것이라 기대되는 공공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태도, 성적 희롱, 모욕도 성폭력이다. 여혐 표현이 문제없이 발설되는 최근 현상들도 고려했다”고 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경험, 한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타인으로부터 원치 않게 가슴이 만져진 순간의 놀람과 충격보다 어떤 놈이든 내 몸을 함부로 침범할 수 있다는 불쾌한 깨달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엄연한 성폭력, 강제추행이다. 내 경험이 가해자들이 폭력적으로 쓰는 슴만튀, 엉만튀 같은 은어로 표현되기를 거부한다.”

미디어는 어떻게 여성을 왜곡하나 ‘여혐’은 반복된다. 한번은 미디어에서, 한번은 현실에서. 10월4일 열리는 여성인권영화제 10주년 기념포럼 주제는 ‘당신이 보는 여성은 누구인가’다. 편견과 통념에 기대어 여성과 여성 폭력을 묘사하는 주류 미디어가 바로 폭력을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자, 성차별의 현실이며, 생존자 삶에 대한 실제적 위협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선영은 발제문에서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은폐된 폭력성’에 주목한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나쁜 남자’ 전성시대가 열렸다. <명랑소녀 성공기>(2002)부터 <파스타>(2010), <시크릿 가든>(2010)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인 순정 마초남’이 등장한다. 남주(남자 주인공)와 여주(여자 주인공)의 사회적 격차는 더욱 커졌다. 여주의 생존권을 쥔 남주는 순정으로 포장된 데이트폭력뿐 아니라, 날것의 언어폭력에서부터 물리적 폭력, 불법 해고 등 전방위적인 ‘갑의 횡포’를 부린다. 그는 <파스타>에서 셰프 현욱(이선균)이 자신의 주방에는 여자를 허용할 수 없다며 여성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사랑에 빠지게 될 남자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포석 이전에 더욱 공고해진 남성 권력을 확인시키는 클리셰로 굳어졌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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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파스타>에 출연한 이선균(왼쪽)과 공효진.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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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비하와 성차별적 표현도 빠질 수 없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방송의 여성비하적 표현들이 대부분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온다고 집어 말한다. 10년 뒤 뚱뚱해진 여자친구를 등장시켜 외모를 비하하거나, 개그우먼 가슴 크기를 비교하는 발언을 하며 웃음을 유발(티브이엔 <코미디 빅리그>)하는 식이다. 야구 리뷰 프로그램은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 있는 여성 아나운서의 다리와 신체를 시청자가 응시할 수 있도록 카메라 워크를 구성하기도 한다. 여성 아나운서는 시각적 쾌락의 도구나 가십거리로 전락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관련 뉴스에 대해서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을 보도하면서 성폭행의 성애화, 삽화와 화면을 통해 구체적인 범행을 묘사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모텔 간판부터 내부 침대, 냉장고, 샤워 가운까지 카메라가 구석구석 훑기도 한다. 그는 이런 뉴스들을 일컬어 “피해자 인권을 침해하는 관음증 보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자유롭게 여성의 ‘성’ 말하는 날까지 남성의 욕망에 포위된 여성의 욕망을 돌아보는 자리도 마련된다. 10월2일 서울 은평구 ‘서울 혁신파크’에서 열리는 ‘하는 여자 페스티벌’이다. <이기적 섹스: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동녘) 저자 겸 섹스 토이 판매숍 ‘은하선 토이즈’ 운영자인 은하선(28)씨가 뜻이 맞는 여성 2명과 뭉친 ‘프로젝트 모난’이 주최한다. 은씨는 책에서 남성의 성과 욕망에 맞추지 말고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화제를 모았다.

지금껏 여러 축제에서 섹스 토이 판매 부스를 열기도 한 그가 직접 축제를 기획한 이유는 뭘까.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도 섹스에 대한 금기는 큰 차이가 없다. 50~60대가 섹스 토이를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하지만 그건 20~30대도 마찬가지더라. 섹스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할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아서 그런 공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버자이너 빅토리, 은하선 토이즈, 사이다제작소 등이 참여하는 부스에선 여성 성기와 관련된 다양한 물품을 살 수 있다. 워크숍에서는 월경대 만들기, 여성 성기 색칠 놀이 등이 진행될 예정인데 어린아이들도 체험할 수 있다. 저녁 7시부터는 은하선과 함께하는 ‘섹스 토크 콘서트’가 2시간 동안 열린다. 축제 성격상 여성만 입장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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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페미니스트 모임 ‘불꽃페미액션’은 시청과 국회 앞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불꽃페미액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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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페미’ 등장…더 가까워진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궁금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을 위한 소모임 활동도 활발하다. 20대 페미니스트 모임 ‘불꽃페미액션’에서는 10월11일부터 격주로 ‘페미니즘 고전영화 소모임’을 진행한다. 페미니즘 책읽기 소모임도 준비중이다.

이들의 봄은 유난히 치열했다. 아마추어 여자농구팀으로 처음 뭉친 ‘불꽃페미액션’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거리에 나섰다. 5월 말, 강남역 일대에서 ‘밤길걷기’ 집회를 열었다. 피해자에게 ‘옷차림이 문제, 늦은 시간에 다닌 게 문제’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에 저항하는 의미였다. 7월에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가하며 여성들의 입을 막는 언론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한국여성재단 연구사업팀 홍미희 팀장은 “페미니즘 활동가 재생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강남역 사건’ 뒤 젊은 여성들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성재단은 지난 22~23일 열린 ‘제3회 여성회의’에 불꽃페미액션과 페미디아처럼 자발적으로 조직한 젊은 그룹들을 초청해 페미니즘 확산을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지속적인 활동은 ‘영페미니스트’들의 과제다. ‘불꽃페미액션’ 운영진 이가현(24, 대학생)씨는 “초반에는 여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이슈 파이팅’을 했다. 이제 소모임을 기반으로 향후 대응을 고민해보려 한다. 무엇보다 즐겁게 활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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