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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국의 과학수사> ⑥ 기억 속 '그의 얼굴' 찾아라…몽타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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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각적 기억 활용하는 대표적 과학수사 기법

3D 입체·나이변환 기능…장기실종사건 수사에 기여

연합뉴스

살인사건 용의자 몽타주 [경찰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2010년 7월2일. 모두가 곤히 잠든 오전 3시30분께. 이모(57·여)씨와 그의 아들(24)·딸(22)이 사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 반지하방에 괴한이 절단기로 방범 창살을 자르고 침입했다.

인기척을 느낀 이씨와 딸이 잠에서 깼다가 괴한과 눈이 마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는 두 사람에게 괴한은 마구 흉기를 휘둘렀다. 옆방에서 자던 아들이 달려와 괴한을 막으려다 역시 흉기에 찔렸다.

격투 끝에 괴한은 현장에서 달아났다. 이씨와 두 남매는 몸 곳곳을 다쳤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범인은 다급했던지 신고 온 운동화를 그대로 둔 채 도주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운동화 감식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운동화에 남은 땀 성분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하고서 종전에 축적한 DNA 데이터베이스(DB)에서 일치군을 찾아냈다. 2009년 5월부터 그해 6월까지 면목동 일대에서 발생한 강도강간 사건 용의자의 DNA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지역을 무대로 한 동일인의 연쇄 범죄로 강하게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면목동 주변 지리에 밝은 인물일 것이라는 추론도 나왔다. 문제는 인적사항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역이 좁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용의자 범위를 더 좁혀야 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중랑경찰서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몽타주(montage) 요원 투입을 요청했다.

몽타주 요원은 몽타주 작성 프로그램이 저장된 노트북 PC를 들고 이씨 아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다. 큰 충격을 받은 그의 마음을 충분한 대화로 풀어준 뒤 진술을 받았다. 장장 4시간에 걸친 조사에 이씨 아들은 성실히 응했다.

진술에 따르면 범인은 175㎝ 정도 키에 보통 체격의 소유자였다. 뿔테 안경을 썼고, 앞머리가 길며 눈썹이 짙었다. 여러 특징을 프로그램으로 합성하니 언뜻 보면 대학생 풍의 비교적 '준수한' 외모의 젊은 남성이 나왔다.

완성된 몽타주는 중랑서 형사들에게 배포됐다. 이제 형사들이 본격적으로 발품을 팔 차례였다. 형사들은 몽타주를 들고 현장 주변을 가가호호 돌았다. 6천546가구에 사는 7천296명을 만났다. 말 그대로 지역을 샅샅이 훑었다.

7천296명을 모두 용의자로 몰아 DNA를 채취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몽타주와 인상이 비슷한 315명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의 4.3%로 대상이 줄어든 셈이다. 형사들은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DNA 채취에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경우,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거부감으로 DNA 채취를 꺼리는 경우, "영장을 갖고 오라"며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 등 숱한 난관에 부닥쳤다. 설득하느라 형사들은 애를 먹었다.

인근 주민 조모(27)씨도 비슷한 경우였다. 형사들이 4차례나 집을 찾아갔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7월31일 다시 집을 찾아간 경찰이 인기척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자 마지못한 듯 조씨가 밖으로 나왔다. 몽타주와 인상이 꽤 비슷했다.

"죄가 없는데 DNA 채취를 거부하시면 괜한 의심만 삽니다. 끝내 협조를 못해주시겠다면 DNA 시료 채취 영장을 발부받아 다시 오겠습니다." 형사들의 말에 압박을 느낀 조씨는 결국 구강 상피세포 채취에 응했다.

5일 후인 8월4일 오전. 조씨가 제 발로 중랑서에 나타났다. 형사들을 만난 그는 그간 면목동 일대에서 일어난 강도·성폭행 사건이 자신 소행임을 털어놨다. DNA가 채취됐으니 체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먼저 자수했다고 그는 말했다.

'면목동 발발이' 사건으로 회자된 연쇄 강력사건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조씨는 흉악범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외모가 준수했다. 자수한 그의 실제 얼굴은 이씨 아들의 진술로 만들어진 몽타주와 느낌이 꽤 비슷했다.

◇ 기억 활용하는 과학수사의 '원조'…특징점 찾기가 관건

몽타주의 어원은 '조립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monter'(몽테)다. 범죄 수사에 쓰이는 몽타주도 결국 '조립' 또는 '합성'에 해당한다. 피해자나 목격자에게서 범인의 눈, 코, 입, 머리 모양 등 얼굴 주요 부위 생김새를 진술받아 각각의 특징을 합성, 범인과 유사한 얼굴 그림을 만드는 기법이다.

몽타주는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대표적 수사기법이다. 고대에도 도주한 범죄자를 찾을 때 피해자나 주변인 진술을 토대로 얼굴을 그린 수배전단을 곳곳에 붙였다. 현상금을 내걸어 적극적인 제보를 유도하는 것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기억을 활용하는 과학수사 기법 중 가장 역사가 길고 보편적이라 할 만하다.

물론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현장에서 범인을 잠시 스치듯 본 목격자는 말할 것도 없고, 범인을 가까이에서 본 피해자라도 얼굴을 온전히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한 번 본 이미지를 마치 사진처럼 정확히 기억하고, 말로 상세히 풀어낼 수 있는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는 드물게나 존재할 뿐이다.

이 때문에 몽타주는 애초 실물과의 일치를 기대하지 않는다. 몽타주를 보고 한눈에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전반적인 이미지와 느낌이 비슷하면 충분하다. 이를 토대로 많은 제보를 받는 것이 몽타주의 주된 존재 이유다.

사극에 등장하는 범죄자 수배전단을 보면 짙은 눈썹이나 부리부리한 눈 등 얼굴의 특징점을 심하게 과장해 실물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단을 본 사람들은 실제 해당 인물을 만나면 한눈에 알아보곤 한다. 일부 특징을 과장한 '캐리커처'가 이런 그림인데, 몽타주의 성격도 본질적으로는 그와 같다.

몽타주는 범인을 위축시켜 자수를 유도하는 도구로도 활용된다. 비록 실물과 차이가 있더라도, 범죄자들은 수배전단에 인쇄된 몽타주를 보면 한눈에 자신의 얼굴인 줄 알아본다고 한다. '누군가가 곧 나를 알아보고 경찰에 신고하겠지'라는 심리적 위축 효과가 몽타주의 또 다른 기능이다.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몽타주는 최면수사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실제로 최면수사를 몽타주 작성에 접목해 정확도를 높이는 기법도 있다. 피해자나 목격자를 최면에 들게 해 시각적 기억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 사건 당시 목격한 이미지를 진술받는 방식이 수사 현장에서 쓰인다.

피해자나 목격자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기억을 제대로 떠올리기 어려운 것도 몽타주와 최면수사의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몽타주 요원은 최면수사관처럼 미리 피해자나 목격자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라포(rapport, 친밀감)를 형성한다.

이후에는 진술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최면처럼 진술자의 의식 자체를 사건 당시로 돌려놓지는 못하지만, 진술자가 기억에 고도로 집중하도록 돕는 것이 몽타주 요원의 핵심 역할이다. "이렇게 생기지 않았던가요?" 식으로 기억에 개입하는 일은 금물이다. 결국 몽타주는 진술자가 작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몽타주를 담당하는 경찰관은 일종의 '기기' 역할에 그쳐야 한다.

진술자 기억에 맞춰 몽타주를 작성한 뒤에는 마지막으로 '총평'을 받는다. 진술자가 보기에 기억 속 범인 얼굴과 몇% 가량 일치하는지, 특히 비슷한 부위는 어디인지, 어느 부위는 좀 덜 닮았는지 등을 꼼꼼히 묻고 기록한다. 몽타주를 당장 수사에 활용해야 하는 형사들에게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 3D 입체 구현에 나이변환까지…몽타주의 진화

과거의 몽타주는 손으로 직접 그리는 일종의 '인물화'였다. 한국 경찰이 1975년 몽타주 업무를 시작할 당시에도 미술 경력자를 전담요원으로 특별채용했다. 일선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진술을 토대로 초상화풍 몽타주를 그렸다.

범죄가 증가하면서 손그림 방식으로는 몽타주 수요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PC용 몽타주 프로그램을 이미 개발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인 얼굴형을 토대로 만든 프로그램이어서 국내에서 쓰기는 부적절했다. 이후 한국 사정에 맞는 프로그램이 개발돼 1999년부터 범죄 수사에 활용됐다.

몽타주 프로그램 DB에는 다양한 인상착의가 항목별로 저장돼 피해자나 목격자 진술에 최대한 가까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눈, 코, 입 등의 생김새나 머리 모양, 안면 윤곽 등 기본 요소부터 안경이나 모자 등 소품, 심지어 눈 밑 '다크서클'까지 여러 선택지를 조합해 하나의 몽타주를 만들어 낸다.

정보기술(IT) 발달은 '3차원(3D) 몽타주'라는 신기술도 선보였다. 과거의 몽타주는 2차원 평면에 구현됐지만, 경찰이 작년 도입한 3D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입력된 정보를 토대로 정면뿐 아니라 좌우, 위, 아래 등 여러 각도에서 몽타주를 볼 수 있다. 360도 회전시켜 얼굴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다.

폐쇄회로(CC)TV 등 인간의 눈과 기억을 대체할 장비가 날로 발달하는 탓에 몽타주도 사양길을 걷는 과학수사 기법의 하나다. 그러나 다른 증거가 마땅치 않아 피해자나 목격자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사건에서 몽타주는 용의자의 단서를 제공하고 수사 범위를 좁힌다.

최근 몽타주는 '장기실종자 찾기'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먼저 실종 당시 사진을 몽타주로 만든 뒤 몽타주 프로그램의 '나이 변환' 기능을 이용, 시간이 흐른 만큼의 얼굴 변화를 기존 몽타주에 반영한다.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지만, 나이 변환 몽타주로 38년 전 실종자를 찾은 사례가 최근 실제로 나왔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 수사와 관련한 몽타주 의뢰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지만, CCTV 등 물리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는 사건 등에서 몽타주는 여전히 유용한 수사기법"이라며 "나이 변환 몽타주로 장기 실종자나 장기 미제사건 범인 얼굴을 추정하는 등 활용 영역은 계속 발굴될 것"이라고 말했다.

pul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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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몽타주를 작성하는 경찰청 몽타주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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