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1 (토)

잊힌 무림 '오락실',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가혹해진 규제… 오락실의 몰락 불러]

오락실 주인의 한숨 "임대료는 오르는데 가격은 제자리"

"오락실 찾는 이유? 감정 있는 사람과 게임한다는 느낌"


머니투데이

평일 오후 방문한 '노량진 정인게임장'. 저녁무렵에는 그나마 사람이 몰리지만 평일 오후에는 한적한 분위기다. /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오락실. 한 남성이 결심한 듯 이 바닥에서 고수로 알려진 사내 옆으로 걸아가 동전을 넣었다. 'Here Comes a New Challenger'(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약속이나 한 듯 둘을 에워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선전했지만 역시 고수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전자는 자신의 자리에 다음 도전자들이 올려놓은 동전을 보고 쓸쓸히 자리를 떴다. 패자는 결과에 승복하고 자리를 넘겨야 하는 것이 무림의 도(道). 승자는 패자에게 격려의 눈길을 보내며 짐짓 피곤한 듯 자리를 비웠다. 승자라도 오랫동안 자리를 독점하지 않는 것이 무사의 예(禮)다.

세월은 흘렀고 무림은 점차 잊혀 갔다. 2000년 한국첨단게임산업협회의 조사결과 당시 2만5000여 곳의 오락실이 있었지만 2016년 정부 3.0의 통계에 따르면 2368개소만이 남아있다. 터전을 잃은 무사들은 그나마 무도(武道)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노량진으로 모여들었다.

머니투데이

1991년 처음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2'가 오락실 한켠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 사천왕 '사가트'(왼쪽)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켄'(오른쪽)은 간단히 피해버리고 반격을 성공시켰다./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격투게임의 '성지'…이제는 단골들만 찾아

노량진에 위치한 한 오락실을 찾았다. 이른바 '성지'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순 없었다. 시설은 다소 낡았고 내부는 한산했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게임은 불후의 명작 '스트리트 파이터 2'였다. 이 게임이 나온지도 25년이 지났다.

"오래된 게임이라 수익은 안나지만 줄곧 이것만 하는 단골들 때문에 기계를 뺄 수가 없어요." 기판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누군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객주의 주인'이었다.

머니투데이

다소 낡은 게임 기판들. 오락실 주인은 수익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꾸준히 찾는 단골 때문에 기계를 뺄 수는 없다고 말한다./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름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50중반 넘은 오락실 주인이죠." 그는 다소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격투게임의 성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늘내일 하는 실정"이라고 대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은둔한 게임 고수들이 많다나 봐요. 그들과 대결해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손님이 오기도 했죠." 그는 추억에 잠긴 듯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단골들이나 기분전환 하러 온 고시생들이 주로 올 뿐 새로운 손님은 안와요. 단골들이야 길면 하루종일이라도 앉아서 게임을 즐기곤 하지만 100원짜리 한움큼 모여봐야 얼마 되지도 않아요."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머니투데이

오락실에서 가장 비싼축에 속하는 게임의 동전 투입구. 하지만 이 가격으로도 500만~1000만원에 달하는 비싼 기계의 구입 비용을 회수하기는 역부족이다./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임대료나 인건비, 기계 가격은 갈수록 치솟고 있는데 오락실 가격은 90년대와 큰 차이가 없어요. 기계비 회수하려고 가격을 올리면 단골들이 오려고 하겠습니까? 이러니 오락실이 절뚝거릴 수밖에요." 그는 수술한지 얼마 안된 시린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장사를 접어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지만 여전히 오락실이라는 장소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기도했다. "게임 개발도 하면서 게임계에만 30여년을 있었어요. 물론 잘 되지는 않았어요. 이 오락실은 내가 마지막으로 게임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운영하기 시작한거예요."

"몇몇 사람들이 좋아해주니 저도 절로 신이 났죠. 그 사람들과 형,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다보니 고맙게도 동아리까지 결성해서 여기를 방문해주는 단골까지 생기더라고요."

머니투데이

'동전 올려놓기'는 전국 어디에서나 통하는 규칙이다. 동전이 올려진 상태에서 게임을 끝마치면 패자는 자리를 비워야한다./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부터 이어진 오락실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덧붙였다. "착한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게임을 하니 서로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어요. '동전 올려놓기'라는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규칙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죠. 그런데도 '양아치 집합소'라는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저희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죠"

◇과거의 영광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오락실·아케이드 게임시장은 전세계적으로는 아직 큰 시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전세계 아케이드게임 시장규모는 전체 게임 시장의 20%이다. 위축된 한국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다시 과거처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다이야기 같은 불법 도박 오락실 사태 이후부터 유독 오락실에만 더 가혹한 규제가 있었어요. PC게임은 게임머니와 같은 새로운 수익 창출 모델을 만들어 냈는데 오락실은 규제 때문에 그런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는 실정이죠."

"수익이 나지 않으니 오락 개발 업체들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개발은 엄두도 못내고 있어요. 최소한 PC게임이 할 수 있는 것을 오락실 게임도 할 수 있게 한다면 기존 게임보다 가격이 비싸도 사람들이 납득하고 게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아케이드 게임 시장 자체가 사멸할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머니투데이

레버를 잡는 방식은 다양했다.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잡는 방식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지만 초보자가 그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다./사진=김종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멀찌감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문득 한적한 오락실 한쪽 구석에서 희미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패배한 사람이 포기를 모른채 다시 도전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응원했지만 어김없이 패배. 온몸을 비틀며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다가가 오래된 오락실을 계속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다소 어이없어 했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했다. "오락실은 오락실만의 맛이 있어요. 처음 보는 사람과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게 있어요. 내가 이 사람하고 한판 붙고 싶다 그러면 잠깐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동전을 넣으면 그만인거예요"

그는 또다시 동전을 넣으며 덧붙였다. "조금 낡긴 했지만 여기서는 예의가 있고 감정이 있는 진짜 사람과 게임을 한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어요. 패배했다고 조롱하거나 비웃는 사람도 없어요.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감정 상하기 쉬운데 감정소모 없이 편안히 즐길 수 있다는건 큰 장점이죠."

이어진 재도전. 선전했지만 역시 고수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도전자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슈팀 김종효 기자 kjhkjh3720@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