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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오기·오역도 새로운 시도의 번역…“외국 문화 중심의 해석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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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오르면서 한국 문학의 위상과 함께 번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외국어 잘하는 한국인의 번역을 시작으로 한국문화를 잘 아는 외국인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의 번역은 꾸준히 진화해왔다. 하지만 번역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원문에 충실해야한다는 원칙론과 각국 문화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응용론이 맞서고 있다. 21세기에 걸맞은 번역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 번역의 현재와 가능성은 무엇인지 두 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번역의 세계]<上> ‘채식주의자’ 이후 달라진 번역의 정의 “상이한 언어구조 해체해 화학적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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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



“번역은 ‘단 한 가지’ 해석을 낳지 않는다. 혹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번역은 새로운 독자들에게 원문이 지닌 다수의 가능성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하고, 동시에 개별적 주관에 따라 작품을 해석할 여지 또한 남겨줘야 한다.”

‘채식주의자’로 한강 작가와 함께 ‘맨부커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29)는 계간지 ‘대산문화’ 올해 여름호에서 ‘번역후기,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질문하고’란 주제의 글에서 “번역가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스미스는 “시적인 연작소설인 ‘채식주의자’는 이런 줄타기가 더욱 중요해진다”며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그 입장과 의미를 두고 서로 천차만별로 나뉘는 해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소설”이라고 규정했다.

‘제2의 창작’으로 탄생한 번역…문장의 일대일 대응 벗어나 전체 그림 봐야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의 해석이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특정한 주의나 이데올로기로 쏠릴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주인공 영예를 자기 몸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젊은 여성의 역할로 한정 해석할 경우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순응에 거부하는 여성이라는 페미니즘 시각만으로 좁혀질 수 있다. 이는 곧 문학보다 사회인류학적 보고서로 읽힐 가능성도 높은 셈이다.

스미스는 “당연히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지만, 원문과 번역문을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고 적확한 문장 구조와 어휘를 찾기 위해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세계 문단에서 한국 문학이 새로운 가능성의 ‘K-북’으로 발돋움하는데 번역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인류 보편성의 본질적 화두와 깊이 있는 세계관 등을 무기로 하는 ‘문학적 콘텐츠’가 우선이라는 원칙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하지만 원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번역은 제2의 창작으로 수용될 만큼 보편성의 본질에 중요한 변수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맨부커상 수상을 계기로 번역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 방식과 흐름에 새로운 변화를 얘기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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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영국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그는 원문을 일대일 대응으로 해석하지 않고 외국 문화에 맞는 문체와 내용으로 번역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 사진제공=한국문학번역원



스미스는 ‘채식주의자’ 1부 번역에서 영혜의 남편 말투가 현학적이어서 원문에 없는 ‘완전히’ 같은 부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했다. 2부에선 성적 묘사를 적절히 옮기기 위해 미사여구를 피하고 임상 보고서 같은 건조함에서 벗어나려고 고심했다.

문화적 보편성과 범용성…원문에 없어도 문화적 맥락으로 ‘첨삭’해야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장편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주노 디아스의 신작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를 번역한 권상미씨는 원문의 비속어 표현을 ‘씨바’로 해석했다. 국내 출판사 편집자가 한국 욕설 ‘씨*’로 고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밉지만 밉지 않은 캐릭터’임을 부각하며 욕설과 희화화의 중간 표현으로 이 단어를 고집했다.

‘오스카~’를 번역할 때 권씨는 딸 롤라가 어머니 벨리시아와 크게 싸우는 장면에서 원문에 없는 욕 ‘이년’을 한국 감성에 이입해 넣었다.

그는 “굉장히 무식하고 즉자적인 성격의 어머니가 비록 욕은 하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악을 쓰는 장면이 그려져 넣었다”며 “그런 ‘구어성’이 우리말과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 데다, 날것의 분노를 우리말로 점잖게 표현될 때 전달력이 부족했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번역은 문화적 맥락과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영어에선 이탤릭체만 써도 웃음을 유발하지만, 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땐 어떻게 해야할까. 번역가의 허용된 ‘창작력’이 요구되는 것은 이 지점인 셈이다.

오기·오역도 ‘번역의 일부’…도착어 중심의 해석 필요

스미스가 ‘채식주의자’에서 보여준 번역의 실수도 적지 않다. 오역에 오기, 문장 빼먹기 등 실수가 10여 군데에 이른다. ‘부지런한’을 ‘attentive’(세심한)으로, ‘샛길’을 ‘main road’로 단어를 잘못 사용하거나 ‘부스럭부스럭 안전 벨트를 맸다’를 ‘fasten her seat belt after a couple of failed attempts’(두어 번 실패 끝에 안전 벨트를 가까스로 맸다)로 오역하거나 ‘아내는 커다랗고 네모진 정육점용 칼을 휘둘러 닭 한 마리를 잘게 토막 낼 줄 아는 여자들이었다’를 통째로 날려 먹은 예가 그것이다.

문장의 일대일 대응 부분에선 번역의 원칙을 훼손했지만, 전체 그림에선 자연스럽게 읽히기 위해 윤문하거나 다른 문화에 거부감을 주는 문장을 덜어냄으로써 번역의 정의를 새롭게 했다.

권씨는 “‘달리다 죽은 개가 식용으로 좋다’는 원문을 오역 처리한 것도 영미권에서 ‘개고기 식용’의 논란을 피하고 독자의 거부감을 막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며 “대중의 기호에 맞게 번역하는 일이 상업적으로 비쳐 지는 측면이 있지만, ‘잘 읽히는’게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발어(한국어)에 대한 충실성과 도착어(영어 등)의 가독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건 번역가의 영원한 숙제일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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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오른쪽)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지난 16일(현지시각) 올해 맨부커상 국제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제공=맨부커상 선정위원회



작가 아닌 독자 중심으로 번역 재편…“원문 중심은 전근대적 사고방식”

생소한 한국 문학이 더 폭넓은 인지도를 갖기 위해 도착어 중심의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스티븐 킹의 저서와 ‘나는 전설이다’ 등 소설만 80여 편을 번역한 조영학씨는 “지금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원전에 기대는 게 아니라 100% 독자 중심으로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며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문법이라는 시스템에 기대면 번역투로 그칠 뿐이어서 상이한 언어 구조를 해체해서 화학적 재구성을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번역계에선 아직 원문 안에서 일부 융통성이 발휘되고, 맛깔난 오역보다 충실한 의역에 기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조씨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영어권에선 애플이 어떤 문맥에서 섹스의 상징으로 풀이되지만, 그걸 사과로 번역하면 완전 다른 의미가 된다”며 “그런 측면에서 애플(사과)을 봉숭아나 앵두로 번역한다고 오역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18세기 소설이라고 그 당시 분위기를 현대에 그대로 옮기는 것 역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8세기 입장에선 ‘세련된’ 번역이었을 작품이기 때문에 21세기에서도 현재 시대의 의미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는 원류도 중심도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가 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라며 “아직 작가 중심의 의도를 운운하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며 번역은 이제 독자와의 관계에서 설명될 뿐”이라고 역설했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김유진 기자 yoojin@, 박다해 기자 doall@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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