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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조선시대 '공식적' 효자 되는데 100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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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휘균 박사 '효자청원문서' 분석…"효자=가문의 명예"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예나 지금이나 효자·효녀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으로' 효자임을 인정받으려면 길게는 100년까지 걸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14일 학계에 따르면 영남대 채휘균 박사는 최근 내놓은 논문 '조선시대 효자 열망에 내재된 욕구 분석'에서 조선 후기인 18∼19세기 경남지역의 효자청원문서를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효자는 부모에게 효행하는 사람을 이르지만, 조선시대 공식적인 효자로 인정받으려면 효행을 관청에 보고하고 조사·심의를 거쳐 제도적으로 공인받는 절차가 필요했다.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효자를 단순히 개인의 선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인정하는 명예로운 자리로 인식했음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효자를 청원하는 주체도 개인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1791년 진주 하진태 집안의 효자청원문서를 보면 하진태의 효행을 보고하는 사람으로 행정구역 책임자인 진주 단동촌의 동장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효자 청원을 한다고 해서 금세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년에서 길게는 100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 청원사례를 보면 진주 하진태 집안은 100년, 합천 전주 전씨 집안은 87년, 함안 김세한 집안은 79년이 지나서야 효자로 최종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1∼10년 비교적 단기간에 이뤄질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장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조선시대에 효자로 인정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한 가문에서 효자를 청원할 때는 1명이 아닌 여러 명의 효행을 복수 청원하는 사례도 있었다.

효행뿐 아니라 열행(烈行·정절을 훌륭하게 지킨 행위), 학행(學行·학문과 덕행), 충(忠) 등에 대해서 함께 포상을 청원하기도 했다.

일례로 고성의 박치상 부부는 부부의 효행을 청원했고, 합천의 박민영 집안은 박민영과 처 송씨, 형수 허씨 세 사람의 효행을 '삼효'로 청원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청원을 하는 것은 가문의 명예를 드러냄과 동시에 효과적이고 광범위한 신청으로 보다 유리한 결정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깔렸다.

채 박사는 "효행에 대한 인정과 포상을 청원하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이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높이기 위한 욕구와 관련돼 있다"며 "다만 효자로서 인정받고 포상받기 위한 목적의 효자청원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효행과는 구분된다"고 말했다.

논문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국학연구' 최신호에 실렸다.

e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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