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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착한 건축, 착한 세상 꿈꾸던 착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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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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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가신이의 발자취 양상현 민족건축인협의회 의장

폼 내고 거들먹거리기보다

농촌마을 찾아 쉼터 만들고

어린이도서관에 남다른 애착


시인이고 싶었고 건축가로 기억되고 싶어 했던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가 불의의 사고로 52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1996년부터 20년간 민건협 여름캠프로 전국 곳곳의 시골마을에 흘린 땀과 노동의 흔적이 여전하고 2000년부터 진행한 고등학생을 위한 예비건축대학과 어린이 건축캠프에서 강의하던 목소리가 생생한데 이제 그를 기억으로만 만나야 합니다.

95년 여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건축 강좌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서울대 박사과정이던 그가 월간 <건축문화>에 기고했던 서정적인 글을 좋아했던 나는 오랜 벗처럼 스스럼없이 가까워졌습니다. 그 뒤로 20년 넘게 친구 같은 형으로, 힘든 건축계의 현실을 고민하는 동지로, 나의 무지를 일깨우는 스승으로 함께했습니다.

94년 진보적인 젊은 건축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기용 선생을 초대 의장으로 모시고 출범한 민건협은 고인이 의장으로 임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96년 건축계 최초의 ‘여름 건축캠프’를 열어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과 건축에 종사하는 이들의 열띤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었고, 2000년부터는 ‘우리 시대의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로 여름이면 농촌 마을을 찾아 쉼터를 만들거나 마을 환경을 개선하는 등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며 참된 삶터를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건축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 착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특히 아산 송남초교의 ‘솔향 글누리 도서관’을 설계하는 등 어린이도서관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습니다. 대학 때부터 ‘반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스무살도 더 어린 후배까지 살뜰히 살피는 문학도였습니다. 사회와 공공의 관점에서 건축을 논하는 저서와 전통사찰 건축을 소개하는 책을 펴내는 등 다양한 역량을 가진 저술가였습니다. 안식년 연수차 방문한 미국 뉴저지주립 럿거스대학 도서관에서 ‘그리피스 컬렉션’의 미공개 근대 사진자료를 발굴해 100여년 전 우리 땅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연구에 들떠 있던 영락없는 학자였습니다.(<한겨레> 2014년 12월22일치) 그가 황망히 떠나고 나니, 그가 이루고자 꿈꾸었던 많은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13년 한 신문에 기고한 그의 글은 선언처럼 건축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건축은 이제 그 본질인 사회와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사적인 시장에 머물러 있는 건축은 우리 도시를 더욱 피폐하고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의 도시에도 폼 나거나 거들먹거리는 건축보다 시민의 시선과 보행자의 발걸음을 배려하는 착한 건축이 더욱 필요하다. 건축가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주저하지 않을 때 건축이 비로소 그 본질인 사회적 의미를 실현할 수 있다. 건축이 먼저 손을 내밀어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의미를 스스로 구현해 냄으로써 세상도 역시 건축가의 자격을 반겨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건축의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건축이여, 탕아처럼 돌아오라.’

그가 거짓말처럼 떠나고 난 뒤 하루, 이틀 지날수록 슬픔이 더욱 커져 갑니다. 그의 죽음으로 건축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었던 우리들의 걸음이 더디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서는 것은 아닌지 서늘하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새벽, 고인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세상이 그지없이 맑고 아름다웠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윤의식/민족건축인협의회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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