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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고속도로도 바다도 난민들 무덤… EU '쿼터제' 도입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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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향한 난민들 죽음의 행렬

오스트리아서 발견된 냉동트럭 안

산소 부족 등으로 71명 숨져

獨, 난민 복지 강조하는 목청 커져

한국일보

오스트리아 경찰관들이 27일 오후 난민 시신 70여 구가 발견된 냉동트럭 주변을 조사하고 있다. 비엔나=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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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냄새는 ‘정직한 치킨(Uprimne kurca)’이라 쓰여진 7.5톤 냉동트럭의 뒷문을 열기 전부터 풍겨오고 있었다. 27일(현지 시간) 정오. “악취가 나는 액체가 도로 변에 세워진 냉동트럭에서 흘러나온다”는 신고를 접수 받은 오스트리아 경찰은 헝가리 국경과 가까운 노이지들 지역 A4 고속도로로 긴급히 출동했다. 헝가리 번호판을 단 슬로바키아 닭고기 회사(하이자) 소유로 보이는 냉동트럭의 뒷문은 미세하게 틈이 벌어져 있었다. 시신이 썩은 물은 이 문틈으로 흘러 나와 고속도로 비상주차 공간을 적시는 중이었다. 영국 방송 채널4는 “문을 열기 전부터 죽음의 냄새가 근방을 가득 채웠다”며 “경찰들이 열어젖힌 냉동트럭 안쪽에는 70구가 넘는 시체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썩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현지 경찰은 “희생자들은 시리아 난민으로 보인다”며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밝혔다.

생명을 건 아프리카와 중동 난민들의 유럽 러시가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이미 2,500명이 넘는 난민들이 지중해에서 수장된 데 이어,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에선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최악의 난민 집단 사망 현장이 발견된 것이다.

이 충격적 사건이 있던 날 유럽연합(EU)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난민 사태를 풀기 위해 회원국이 각각 난민을 분배해 받아들이는 일종의 쿼터제도 도입을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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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국경없는의사회 회원들과 스웨덴 해안경비대원들이 지중해에서 좌초된 난민선에서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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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 이용해 잇속 챙긴 브로커들 횡행

한스 피터 도스코질 오스트리아 경찰청 대변인은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시리아인으로 보이는 어린이 4명, 여성 8명을 포함한 시신 71구를 트럭 안에서 수습했다”고 밝혔다. 도스코질 대변인은 “트럭은 발견 전날 헝가리 부다페스트 동부를 지나 밤새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며 “시신의 상태로 보아 트럭이 오스트리아로 오기 전 난민들이 숨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헝가리 경찰도 이날 “난민을 실어 나른 브로커로 추정되는 용의자 4명을 헝가리에서 붙잡아 조사 중”이라며 “세 명은 불가리아, 한 명은 아프가니스탄 국적”이라고 전했다.

영 일간 가디언 등은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에서 발견된 난민 집단 사망 사건의 배경에는 난민의 고혈을 짜내 배를 채우는 불법 브로커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경찰의 수사에 따르면 이들 브로커는 쉽게 검문에 걸리지 않는 냉동트럭을 난민들에게 제공하고, 이들로부터 대신 최소 1인당 500유로(약 66만원)를 받아 챙겨왔다. 하지만 이미 돈을 받은 브로커들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기 전 “숨을 못 쉬겠다”는 냉동트럭 안 난민들의 호소를 무시한 채 도주했고, 결국 굶주림과 산소 부족으로 난민들이 집단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시신으로 발견된 난민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냉동창고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트럭의 문틈은 이때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한나 미클 라이트너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은 27일 “오스트리아 정부는 난민 브로커에게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끊임 없는 비보에 유럽연합 머리 싸매

27일 난민들의 비보는 지중해에서도 들려왔다. 리비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하던 난민선 2척이 지중해 리비아 주와라시 연안에서 전복돼 최소 105명이 숨졌고, 사망자는 200명에 달할 수 있다고 영 BBC 등이 전했다. 외신에 따르면 난민 50명을 태운 소형 선박이 먼저 구조 요청을 보냈고, 곧바로 400여명이 올라탄 두 번째 난민선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리비아 해안경비대는 201명이 구조됐지만 나머지 난민은 생사가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28일 유엔에 따르면 올해 유럽으로 입국을 시도한 지중해 난민 수가 30만명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2,500여명은 숨졌다.

난민들의 대규모 유입을 막으면서 동시에 이들의 인권과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유럽 국가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헝가리의 경우 세르비아와의 국경 펜스를 한층 강화하는가 하면, 세르비아는 “근본적으로 EU의 문제이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난민과 관련된 사망 사고가 잇따르면서 부담이 커진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유럽 각국이 의무적으로 쿼터를 정해 난민을 받아들이는 제도가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이견이 만만치 않아 최종 시행까지는 장애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가디언은 “독일이 이러한 쿼터(할당)제 도입을 요구했고,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얻어냈다”라면서 “그러나 스페인과 동유럽 지도자들은 처음 쿼터제가 거론된 6월 이후 반대를 지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EU 회원국 간 논의 과정에서 난민의 복지를 강조하는 독일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영 파이낸셜타임스는 “극우단체 폭력사태에 대해 목청을 높이고 지난 6월 기민당 창당 70년 행사에서 난민 수용에 대해 긍정적인 연설을 하는가 하면 24일엔 모든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는 등 메르켈 총리가 과감한 이민자 정책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스트리아 난민 집단 사망 사건이 보도된 27일에도 메르켈 총리의 난민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난민 관련 발칸 국가 정상들의 회의 참석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 중이던 메르켈 총리는 “유럽 국가들이 단결해서 난민의 인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행위에 대항해야 한다”고 밝혔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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