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3 (목)

[강명관의 심심한 책읽기]자전 이야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일제 때까지 베스트셀러, 시대별로 종류도 많았는데

이젠 스마트폰이 방대한 ‘한어대사전’을 삼켰으니…


경향신문

친구가 스마트폰에서 기묘한 사전을 보여준다. 스마트폰 화면에 한자를 쓰면 곧 현재 가장 큰 한자 사전으로 알려진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의 해당 한자 항목이 뜨는 것이다. 엄청나게 편리하다. 10책이 넘는 사전이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사전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일제강점기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자전이었다고 했는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요즘은 어떤 사전도 베스트셀러에 들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만 해도 여전히 한문을 읽었고 국문이라 해도 한자말투성이의 국한문 혼용을 했으니, 당연히 한자 자전의 수요가 많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사전에 대한 수요가 이처럼 높았다면, 순전히 한문을 사용했던 조선시대에는 그 수요가 더 컸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조선시대에는 더 많은 다양한 사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한자 사전은 없었다.

원래 모르는 한자를 찾는 사전은 중국에서 세 가지 종류로 발전했다. 첫째 의미상 같이 엮일 수 있는 한자를 모은 사전이다. 예컨대 ‘집’이란 의미를 갖는 한자를 모으는 방식이다. 가(家)·실(室)·당(堂)·재(齋)·누(樓)·헌(軒)·관(館)·관(觀) 등은 모두 ‘집’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종류별로 한자를 모은다. 한(漢)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이아(爾雅)>가 그 최초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운서(韻書)가 있다. 한시를 지을 때 한자의 운(韻)과 그 글자의 평·측을 알아야 한다. 모든 한자를 106운으로 나누고(206운으로 나눈 것도 있으나 잘 쓰이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 쓴 것은 106운이었다), 각 운마다 글자를 소속시킨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광운(廣韻)>을 시작으로 다양한 운서가 만들어졌으며 고려와 조선은 그것들을 수입해 사용했다. 한편 조선에서도 운서를 제작해 사용했는데, <규장전운(奎章全韻)>(1800)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세 번째 사전은 <자서(字書)>다. 즉 전혀 모르는 글자가 나왔을 때 그 글자의 음과 뜻, 운 등을 알기 위한 사전이다. 후한의 허신(許愼, 30~124)이 만든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엮고 처음으로 540개의 부수를 제시해, 부수로 한자를 검색하는 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을 따라 양(梁)나라 고야왕(顧野王)의 <옥편(玉篇)>, 명나라 매응조(梅膺祚)의 <자휘(字彙)>, 청나라의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이 만들어졌다. <옥편>부터는 부수의 수도 214개로 줄었다. 20세기 이후 근대식 자전이 만들어졌으나 온갖 한자 자전에 ‘옥편’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고야왕의 <옥편>의 영향력은 정말 장구하다 하겠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강희자전>은 4만7053자를 수록한 가장 정보량이 많은 사전이었고, 이후 자전은 모두 <강희자전>을 모본으로 삼았다. 비록 ‘옥편’이란 이름을 달고 있어도 내용은 <강희자전>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경향신문

고려와 조선은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중국의 운서와 자전을 수입해 사용하거나, 그것을 복각(覆刻)해 사용했다. 만든 것도 몇 종 있지만, 널리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조선에서 제작한 운서와 자전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규장전운>과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등이 중국의 다양한 운서를 참고해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강희자전>을 바탕으로 만든 자전이다. 이 두 책은 정조 이후 민간에 가장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20세기 초반까지 관판본(官板本)은 물론이고 민간의 방각본(坊刻本)으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던 것이다.

한자 사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해 그것만으로도 거창한 학문의 분야가 된다. 또 이 방면의 연구 업적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전들이 과연 얼마나 발간되고 유통, 이용되었는가는 아직 선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책값이 엄청나게 높았다. 과연 조선시대의 과거를 준비하는 사족 양반들은 모두 다양한 사전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과감히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다. 잠정적인 추정으로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어릴 적 한문을 배울 때는 선생님이 뜻과 음을 알려준다. <천자문>이나 <유합(類合)> 같은 글자를 모아 놓은 책을 배운다. <천자문>은 다 아는 책이니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유합>은 한자를 의미별로 분류한 것이다. 서거정(徐居正)이 만들었다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글자를 가르치는 텍스트부터 읽고 외우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뒷날 이게 적절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비판이 있어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이 일상생활과 밀접한 글자 3360자를 모아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선조 때 유희춘(柳希春)이 <유합>을 개정해 수록 한자 수를 2배 정도로 불린 <신증유합(新增類合)>(3000자)을 엮기도 했다. 이런 책들이 주로 어린이를 교육할 때 사용한 한자책이었다.

약간 복잡한 텍스트는 스승에게 뜻과 음을 배우고 다시 또 읽고 외우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기본적인 한자를 익힌다.

하지만 조금 더 수준이 올라가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논어>나 <맹자>를 읽다가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대개 어려운 글자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 글자의 음은 무엇이고 뜻은 무엇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석이 없는 책들은 어떻게 하는가? 스승을 찾아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에는 어떤 글자를 써 놓고 무슨 뜻이냐고 묻는 편지와 이덕무의 답장이 여러 통 실려 있다. 워낙 박학한 이덕무이기에 그런 문의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덕무만이 아니라 다른 문집에서도 더러더러 보인다. 지면이 짧아 상론하지는 못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만든 한자 자전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30년에 걸쳐 만든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2008년 완간, 모두 16권)이 아닌가 한다. 이 사전으로 일본식 자전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롭게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