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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15세 무용천재, 낯선 도쿄 무대도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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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교수 '시미즈문고' 서 발굴

무용 입문 7개월, 사실상 데뷔작

도쿄 백화점 옥상서 3인무 소개

중앙일보

1926년 10월 3일, 일본 도쿄 미스코시백화점 옥상에서 3인무 ‘그로테스크’를 추는 최승희(사진 맨 왼쪽). 당시 15세로 일본에 춤 유학간 지 7개월 만이었다. [사진 춤 자료관 연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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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20세기 전반 활동한 신(新)무용가 최승희(1911~67)가 춤추는 모습을 담은 가장 오래된 동영상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승희가 1926년 10월 3일 15세 나이로 도쿄 미스코시백화점 옥상에서 공연한 무대를 기록한 영상을 21일 공개했다. 최승희의 무용 영상물로는 최고(最古) 자료다.

동영상은 3분 남짓 분량으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여성 3인무인 ‘그로테스크’를 추는 최승희의 앳된 자태를 담고 있다. 이 무렵 최승희는 음악가의 꿈을 키우며 숙명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꿈나무였다. 26년 3월, 운명은 그를 춤의 세계로 이끈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 漠, 1887~1962)의 서울 공연을 보러 갔다가 첫 눈에 이 신무용의 아버지에게 매료당한다. 이시이 바쿠는 유럽에 유학한 1세대 무용가로 일본에 처음 현대무용을 들여 온 인물이었다. 일본인이면서 식민지인에 대한 민족적인 차별의식이 없었다. 당시 경성방송국에 다니던 오빠 최승일의 소개와 권유로 이시이 바쿠를 만난 최승희는 바로 그의 문하생이 되어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그로테스크’는 최승희가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계에 입문한 7개 월 뒤 작품으로 거의 데뷔작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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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동영상 속 최승희(사진 왼쪽)의 또 다른 장면. 1920년대 이미지 자료 중 가장 오래된 동영상 기록물로 희소가치가 높다. [사진 춤 자료관 연낙재]


이 동영상은 현재 일본 시즈오카현 시마다(島田) 시립도서관 ‘시미즈(淸水) 문고’ 소장품이다. 시미즈 문고는 문화 자료 수집가였던 시미즈 신이치(1889~1986)가 기증한 컬렉션이다. ‘그로테스크’는 시미즈 문고 속 ‘쇼와(昭和) 초기의 영상’이란 제목 영상물 안에 들어있었다. 필름 제조회사가 제품 설명회를 겸해 마련한 촬영대회에 이시이 바쿠 무용단이 초청 공연을 펼친 기록물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주최자는 도쿄 베비시네마 구락부 아사이 클럽으로 아마도 프로와 아마추어 촬영자들을 위한 시연회 성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영상을 발굴한 성기숙 교수는 “최승희 무용 영상 중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그로테스크’에 대해서 성 교수는 “유럽에서 공부한 이시이 바쿠의 낭만적 유희성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일본 전통 무용의 제의적 율동성을 가미해 제목 그대로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감을 지닌 춤사위를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반 년 남짓 만에 서구 현대무용의 안무를 소화한 최승희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기록물이라는 평도 덧붙였다. 널리 알려진 독무(獨舞) ‘세레나데’에 앞선 군무로 최승희의 무용 인생 초기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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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첫 머리에 나오는 자막. ‘그로테스크’란 작품 제목 옆으로 출연진 소개에 최승희(崔承喜)가 보인다. [사진 춤 자료관 연낙재]


이 작품에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친여동생인 이시이 에이코와 또 다른 무용수인 이시이 요시코와 함께 힘 있는 춤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숙명여학교에 재학 중일 때 두 갈래로 땋아 내렸던 긴 머리는 짧은 단발로 바뀌어 신여성의 체취가 물씬하다. 과감하면서도 도발적인 짧은 무용복이 잘 어울리는 체격 조건은 단 몇 달 만에 주역 무용수로 발탁된 그의 타고난 춤꾼 기질을 보여준다. 일본 신문들이 최승희를 ‘일본 무용계에 나타난 별’이라 소개할 만하다. 이 무렵 최승희는 하루 11시간씩 훈련하는 연습벌레였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이런 탄탄한 바탕 위에 최승희는 한국의 예술과 민속무를 연구해 자신의 대표작을 완성해갔다. 파리에 새로운 모자 패션을 몰고 온 ‘초립동’,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춤으로 승화시킨 ‘보살’ ‘석굴암의 벽조’, 전통 검무에 무사의 기상을 조합한 ‘쌍검무’ 등 그의 신작은 늘 화제를 몰고 왔다. ‘그로테스크’는 최승희의 춤이 발아한 씨앗이었던 셈이다.

성 교수는 이 무용 영상물을 내년 1월 22일 춤 자료관 연낙재가 주최하는 학술세미나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이날 ‘그로테스크’와 함께 발굴된 이시이 바쿠의 춤 영상물 ‘마스크’도 함께 상영된다. 02-741-2808.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최승희=일제강점기 미국과 유럽, 중남미에서 150여 차례 공연을 펼쳤던 세계적인 무용가.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음악을 공부하다 26년 일본 유학. 29년 귀국한 뒤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한국에 근현대무용의 씨를 뿌렸다. 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 이후 평양에서 국립최승희무용연구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67년 숙청당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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