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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동계U대회 후유증’ 앓는 덕유산… 설천봉 주변 17년 방치, 잡목만 드문드문 ‘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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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 위해 희귀 구상나무·주목 잘라… 대회 끝나고 정부 나몰라라

평창 동계올림픽 열리는 정선 가리왕산도 ‘깊은 우려’

전북 무주의 덕유산 설천봉에는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U대회) 때 사용된 스키 활강경기장 부지가 있다. 지난 10일 찾은 설천봉 부지에는 개망초·달맞이꽃 등 외래종 식물만 자라나고 있었다. 드문드문 1~2m 높이의 잡목이 보였지만, 수백~수천년간 10~20m 높이의 신갈나무·잣나무·주목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주변 자연숲과는 너무나 달랐다.

설천봉 탐사에 동행한 국립수목원 오승환 박사는 “활강경기가 가능할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보니 자연적인 숲을 이루는 식물들이 뿌리내리는 게 불가능하다”며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한 시트까지 덮여 있어 1~2년생 초본은 몰라도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하는 나무들은 자라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비 내릴 때마다 토양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설치한 시트가 식생의 자연복원을 막고 있는 셈이다. 현장을 둘러본 녹색연합 임태영 활동가는 “17년이 지났는데도 이대로라면 100년, 200년이 지난다고 해도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할 것 같다”며 “겨우 며칠간 활강경기장으로 쓰려고 파괴한 뒤 이렇게 17년을 방치해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지난 10일 덕유산 설천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1997년 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 활강경기장 부지. 17년째 자연 복원이 되지 못한 부지에선 외래종 식물과 잡목만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경향신문

덕유산 설천봉의 비극은 1997년 무주 동계U대회와 함께 시작됐다. 정부는 1989년 U대회 유치를 위해 덕유산의 스키장·리조트 예정지를 자연보존지구에서 해제하고, 민간 임대가 가능토록 국유림 소유권을 전라북도로 이전했다. U대회 유치 성공 후 이어진 스키장·리조트 건설 과정에서 희귀종이자 멸종위기식물인 구상나무와 주목은 마구잡이로 벌목됐다. 모데미풀과 금강애기나리 등 희귀식물 군락도 무참히 파괴됐다. 물고기 금강모치와 함께 덕유산의 백두대간 깃대종으로 지정돼 있는 구상나무는 현재 향적봉 주변에만 군락이 유지돼 있을 뿐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설천봉에서 이뤄진 대규모 벌목이 덕유산 구상나무의 유전적 다양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개발 당시 정부의 복원 약속은 공수표로 돌아갔다. 제대로 된 복원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설천봉 정상과 주변지역으로 이식한 주목 253그루의 절반가량과 구상나무 113그루 전부가 고사했다. 충분한 준비없이 캐내고 심어버린 탓이다. 관광용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며 본 설천봉 활강경기장 부지 주변에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주목과 구상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흡사 나무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해발 1520m인 설천봉까지는 리조트 입구에서 곤돌라가 이어져 있고, 설천봉부터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1614m)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무주군 등과 함께 설천봉 주변에서 나무심기 행사를 벌이고 있지만, 활강경기장 부지는 민간업체인 무주리조트 소유라서 손대지 못하고 있다. 환경부·산림청·전라북도·무주군 모두 민간업체 땅이라며 복원 책임도 회피하고 있는 상태다.

환경단체와 산림 전문가들은 파괴된 덕유산이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의 미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활강경기장 예정지인 가리왕산 중봉에서는 대대적인 벌목이 시작됐다. 정부와 강원도는 ‘복원’을 약속하며 개발에 나섰지만, 환경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복원대책은 없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가리왕산 중봉 아래에 리조트 단지를 신설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정부와 강원도가 가리왕산에서 17년 전 덕유산 개발 후유증의 교훈을 잊고, 42년 전인 1972년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 때만큼의 복원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삿포로 동계올림픽 당시 활강경기장으로 개발된 에니와 국립공원의 가문비나무 숲은 일본 내에서 ‘복원 실패’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비슷한 수종으로 새 숲을 만드는 성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우이령사람들’ 이병천 회장(산림생태학 박사)은 “삿포로에서는 황폐해진 가문비나무 숲 자리에 발아가 잘 되는 사할린가문비나무를 심어 조림해놓은 상태”라며 “강원도와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조금이라도 가리왕산 복원 의지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리왕산의 수종을 조사하고, 미리 조림을 위한 양묘를 해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야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바로 복원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며 “며칠간 스키장으로 쓰기 위해 다져 놓은 토양 복구를 포함해 구체적인 복원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사진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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