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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나의 독재자’ 설경구 “제대로 하려면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뭔가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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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재자’ 무명 배우 역 유명 배우 설경구

배우 설경구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있다. 선이 굵고 무게가 있어보이지만 웃을 때면 진한 인간미와 서글픔이 느껴진다. 영화 속 설경구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의 김영호, <역도산>의 프로레슬러 역도산 역시 내면엔 슬픔이 가득했다.

오는 30일 개봉할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의 그도 아픔과 슬픔이 교차한다. 영화는 19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할 수 있도록 무명의 연극배우를 데려다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처럼 연기를 하라고 주문한다. 설경구는 리허설에서 김일성 역을 하게 되는 무명의 연극배우 김성근 역을 맡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압박감 속에 김일성을 재현해내려고 애쓰던 성근은 리허설이 무산되자 미쳐버린다. 이후 평생을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설경구를 만났다. “사람들이 김일성을 얼마나 똑같이 재현해낼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처음부터 김일성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부자 간의 이야기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고,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영화를 찍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영화 에서 자신을 김일성이라고 믿는 성근 역을 연기한 배우 설경구가 2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남북정상회담 앞둔 대통령과 리허설 위한 김일성 대역 역할

김일성의 흉내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연기


성근에게 가장 중요한 관객은 아들 태식(박해일)이다. 하지만 성근은 번번이 아들에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인다. 처음 주연을 맡은 무대에서도 울렁증 때문에 제대로 된 연기를 못하고, 반평생 동안 자신이 김일성이라 생각하며 미쳐 있어서 가장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꼭 우리 시대 아버지 같아요. 무능하고 권위도 없으면서 권위적이고 싶어하는,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약할 수가 없는 아버지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시절에 먹히고, 자식에게 먹힌 세대죠. 하느라고 했는데 자식들은 항상 아버지 탓만 하고 아버지들은 또 그런 자식에게 물려준 게 없다며 미안해하죠. 연기하면서 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영화가 진행될수록 설경구는 실제 김일성의 모습과 더 비슷해진다. 살을 찌워 배가 나오도록 했고, 거친 북한 사투리도 더 많이 구사한다. 주로 김일성이 훈시를 하는 동영상을 보며 제스처와 표정을 연습했다.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던 탈북자를 만나 사투리를 배웠다.

하지만 설경구는 “김일성을 ‘관찰’하기만 했지 김일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연기하는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을 흉내내야 하는 연극배우 김성근이었다”며 “내 멋대로 사투리도 쓰고 대사도 약간 가래 끓는 소리를 섞어 쓰며 연극 톤으로 구사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잘하고 싶어 미치기까지 하는 성근의 모습은 실제 설경구와 닮아 있다. 배우 설경구를 세상에 알린 영화 <박하사탕>을 찍을 때의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연기가 되지 않아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촬영 중에 감독에게 “감독님이 원하는 만큼 잘해내지 못해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개봉 후에도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오랫동안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을 정도다. 그 과정들을 거친 후 설경구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을까.

“영화 속 성근처럼 제대로 된 역을 맡지 못해도 계속 연극판에 계시는 분들이 있어요. 묘한 끌림이죠. 배우로 사는 거… 제대로 하려면 정말 힘든 거 같아요. 힘들고 아프지만 진심으로 해야만 보는 사람하고 소통이 되니까요. 성근 같은 역을 할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하죠. 그런데 어떤 역할은 그런 고통이 있어야 뭐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 같아요.”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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