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4 (토)

‘국어死典’ 시대… 사전왕국 日을 짚어보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日 고대사회 ‘유취국사’ 편찬부터 근대 백과사전 탄생 1900년까지

‘지식강국’ 日 사전 편찬사 정리

세계일보

오스미 가즈오 지음/임경택 옮김/사계절/1만7800원


사전, 시대를 엮다/오스미 가즈오 지음/임경택 옮김/사계절/1만7800원


민중서림,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교학사 4곳의 출판사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 국어사전 편찬으로 유명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2014년 현재 이들은 더 이상 새로운 국어사전을 만들지 않으며, 기존 국어사전을 증보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출판업계에 마지막 남은 국어사전 편찬자로 알려진 고명수 민중서림 편집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종이사전을 만들어봐야 1년에 200권도 안 팔립니다. 전자사전과 스마트폰의 출시로 2005, 2006년부터 사전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었죠.”

젊은 사람들은 말한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되는데 무슨 종이사전이 필요하냐고. 국어사전이든 백과사전이든 포털사이트 속에 다 들어갔으니 종이사전의 수명은 이제 다했다고. 과연 그럴까. 인터넷의 사전은 종이사전을 그대로 디지털 환경에 옮겨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종이사전이 진보하지 않으면 디지털 사전은 정체할 수밖에 없다. 종이사전 증보판이 나오지 않는 환경에선 신조어나 새로운 지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책은 ‘사전으로 보는 일본의 지식문화사’라는 부제가 붙었다. 일본의 고대부터 근대적 백과사전이 성립한 1900년대 초까지 통사적으로 고찰한다. 오늘날 ‘사전 왕국’으로 불릴 만큼 각종 사전이 넘쳐나고 또 잘 팔리는 일본문화의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여준다.

흔히 일본 하면 사무라이(무사)부터 떠올리며 ‘글이나 책과 거리가 멀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우나 오산이다. 서기 892년 완성한 ‘유취국사(類聚國史)’는 무려 200권으로 된 대형 편찬물로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한다. 저자는 “후세에 전할 만한 공인된 지식을 체계화하고자 정부 주도 아래 ‘유취국사’ 편찬 같은 대규모 사업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사전을 무슨 구닥다리로 여기는 요즘 세태와 달리 처음 사전이 등장한 이유는 바로 ‘미래를 위해서’였다.

무사들이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며 아무래도 고전에 대한 지식이나 문필 활동 등이 전보다 소홀히 다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사들도 사전의 중요성을 절감했는지 도쿠가와 막부는 무려 60년간의 준비 끝에 1865년 ‘무가명목초(武家名目抄)’를 내놓았다. 무사들의 전투와 생활, 의례를 집대성한 이 책은 ‘지식강국’ 일본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한다.

19세기부터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몰려들면서 ‘번역’이 일본 지식계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다. 네덜란드어로 된 백과사전을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없었던 수많은 한자 신조어가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세계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를 몰라 외교적 불이익을 입자 1년 만에 황급히 불화(佛和·프랑스어-일본어) 사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일본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사전의 나라’로 우뚝 서있다. 10년마다 증보판을 펴내는 이와나미서점의 2008년판 사전은 이제껏 100만부 넘게 팔렸다. 감각적인 뜻풀이로 유명한 산세이도 출판사의 사전도 지금까지 7판이 나오며 2000만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세계일보

세계일보의 ‘국어사전, 맥 끊긴 민족지혜의 심장’ 보도 이후 사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민족의 얼을 담은 국어사전이 외면당하는 세태를 한글 창제자 세종대왕은 어떻게 생각할까.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내로 눈을 돌리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민간 출판사는 물론 정부도 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증보할 엄두를 못 낸다. 이 땅의 어린이들은 모르는 용어가 있을 때 사전을 뒤적이는 대신 네이버 지식검색에 의존한다. 박근혜정부는 ‘문화 융성’을 내걸었으나, 그 문화의 기본이 되는 말과 글을 담는 사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즘 너도나도 ‘한류’를 말하는데, 우리가 쓰는 국어사전이 부실한 상황에서 외국인이 과연 올바른 한국어를 배울 수 있을까.

영국 총리를 지낸 스탠리 볼드윈은 “외딴 섬에 홀로 단 하나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정치인을 앞으로 한국에서도 꼭 보고 싶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