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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고시촌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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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탓 인구 줄자 고시식당 ‘먹튀’… 사시학원에 ‘언론고시반’도

“5년 전에는 창밖을 내다보면 사람들 머리밖에 안 보였다던데, 지금은 주말에도 한산합니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9동)에서 2년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씨(44)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 대학동에서는 고시생을 대상으로 하는 ‘고시식당’ 운영자가 문을 닫고 식권 대금만 챙겨 달아나 인근 주민과 고시생 수십명이 손해를 본 사건이 발생했다. 이씨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3000원짜리 식권을 100장 끊었는데, 9장은 쓰지 못했다. 이씨는 “고시식당 먹튀 사건이 낯선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1년 전인가 또 다른 고시식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고시식당뿐 아니에요. 근처 식당도, 슈퍼마켓도 몇 년 전부터 해마다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예전과 너무 다른 겁니다. 우리도 한때는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렸는데….”

흔히 ‘녹두거리 중심가’라고 불리는 롯데리아-민들레영토 사이 골목에 있는 이씨의 카페는 이 지역에서 비교적 장사가 잘되는 곳이다. 이씨는 “아마 고시촌 카페 중에서는 매출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고 꼽았다. 그럼에도 이씨는 전세금 9000만원에 월 300만원의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위험부담은 있더라도 수익을 더 올리기 위해 카페를 하나 더 차려볼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한때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던 ‘신림동 고시촌’의 상권이 급격하게 퇴조하는 것은 2008년 도입된 로스쿨 제도 때문이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급감하면서 지역 상권도 함께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은 “사시뿐 아니라 행시와 외시도 ‘고시생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이 추진되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대학동 우동집의 한 종업원은 “과거에 비해 매출이 3분의 2에서 절반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고기뷔페를 운영 중인 서모씨(31)도 “매출이 70%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인쇄소의 주인은 “사시 관련 족보 만드는 사람이 줄어드니 매출이 이전 대비 30~40%가 감소한 것 같다”고 말했다. 냉면집을 운영하는 임모씨(44)는 “우리도 로스쿨 도입 후 매출이 2분의 1로 감소했다. 예전에 로스쿨 도입 전에는 여기 예비군 등록인구가 6만명이라던데, 지금은 3만명이란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시준비생 양모씨(28)는 “독서실에도 빈 자리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장모씨(37)는 “26만원이던 방세가 올해 21만원으로 낮아졌다”고 전했다. 업종을 변경하는 곳들도 있다. 사법시험 학원으로 유명했던 모 학원은 최근 ‘언론고시반’을 신설했다. 10년째 장사를 해온 책방 주인 김모씨(48)는 “3년 전에는 식사 시간이면 명동거리 같았는데, 지금은 한산하다. 새로 유입되는 고시생이 없기 때문”이라며 “십수년째 고시책을 사가던 양반이 이번에는 토익책을 사가더라”고 전했다.

대신 카페는 부쩍 늘었다. 대학동에서 11년째 사는 장모씨(31)는 “서울대생들의 대규모 과행사가 줄어들다보니 한 번에 40~50명씩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술집이 줄어들었다. 반면 공무원시험,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카페가 늘었다”고 전했다. 고시생 김모씨(26·여)도 “이곳은 아메리카노가 2000원 정도 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커피값이 저렴하다. 아마도 전국에서 제일 커피값이 싼 지역일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하·김여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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