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의 즉각 공감을 부르는 연기
조훈현·이창호의 상반된 기풍 살려내
“바둑은 나 자신과의 싸움”
26일 개봉하는 영화 ‘승부’에서 배우 이병헌이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을 연기한다. [바이포엠스튜디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승부의 세계에서 일류(一流)가 못되면 서글픈거다”(이병헌이 연기하는 조훈현의 대사)
보통의 스포츠는 무승부조차 없어야 하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야만 하는 가혹한 승부의 세계다. 그중 바둑은 가장 정적이다. 흑돌을 잡은 기사와 백돌을 잡은 기사가 마주 앉아 바둑판 위에 돌을 둔다. 상대의 돌을 포박해 더 많이 뺏으면 승리한다. 움직임은 고작 오른손과 눈동자뿐. 그러나 바둑기사의 속은 활화산처럼 불타기도, 천길 낭떠러지처럼 암담하기도 하다.
바둑에 대해선 이 정도만 알고 영화 ‘승부’를 보아도 충분하다. 26일 개봉하는 이병헌·유아인 주연의 ‘승부’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조훈현 국수(國手, 한 나라를 대표할 정도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와 그 제자 이창호 바둑기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스물두살 나이차의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조 9단은 세계대회를 재패한 명실상부 국내 바둑의 전설이었고, 이창호는 바둑에 기재(奇才,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촉망받는 신동이었을 뿐이다.
일찍이 이창호(아역 김강훈)의 천재성을 알아본 조9단은 그를 내제자 삼는다.[바이포엠스튜디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배우 문정희는 조 9단의 아내 정미화 여사이자 이창호의 ‘작은 엄마’를 연기했다. 아무리 80년대였어도 생판 남과 한 집에서 먹고자는게 쉬웠을리 없다. 문정희는 “어렸을 때는 창호 편을 들었지만, 창호가 스승인 조 국수를 이기고 나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 참 고민이 됐다”며 “바둑기사는 아니지만 두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여자를 표현하고 싶었다. 실제로 정미화님이 그렇게 당찬 분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승부’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은 “타향살이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자기만의 바둑(기풍)을 찾는 과정에서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면서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라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유아인이 연기하고부터는 이창호는 우리가 흔히 아는 ‘돌부처’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아인은 ‘육십 먹은 노인네, 팔십 먹은 노인네처럼 바둑을 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스승인 조9단의 공격적인 바둑과 정반대로 느리고 작은 승리가 될 지라도, 절대 지지 않는, 반드시 이기는 보수적인 바둑을 둔다.
1990년 2월2일.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큰 변곡점을 맞이한다. 15살의 이창호가 파죽지세로 전국 단위 29기 최고위전에서 결국 결승에 올랐다. 단 ‘반집’ 차로 스승 조훈현을 꺾는다.
이병헌은 조훈현의 턱과 입을 괴는 손 제스쳐 외에도 승리가 예감될 때 한쪽 다리를 떠는 모습을 면밀히 연구해 모사했다. 영화 안에서 남기철(조우진 분) 기사 등 라이벌을 꺾을 때마다 시그니처 포즈를 보여주었지만, 이날 제자와의 대국 중에는 이전에 없던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
80년대 시대 고증에 성공한 영화 ‘승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당시 기사에 따르면 조9단이 “패배가 확정되자 환한 웃음으로 이4단(이창호)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고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혼비백산해 다급히 대국장을 빠져나가는 ‘소인배’스러운 모습을 그려냈다. 10년은 더 있어야 제자가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도 빨리 ‘자기가 키운 호랑이’에 잡아먹힌 탓이다. 이병헌이 스스로의 작음에 부끄러워 몸부리치는 연기는 역시나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조훈현이 이창호처럼 신예였던 1964년. 그도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에게서 받은 바둑판에 “바둑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적어놓았다. 오랜 시간 그 바둑판을 꺼내볼 일 없던 조9단은 까마득한 제자에게 패배하고 난 후 ‘초심’을 찾는 마음으로 광에서 꺼내 쓰다듬는다.
이병헌은 시사회에서 “정상에 있던 사람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예선부터 수많은 대국을 치르면서 정상으로 올라갈 때의 그 마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마음일 것”이라며 “이런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재미를 느꼈다”고 밝혔다.
바둑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사와 일에 있어서도 ‘무심’과 ‘성의’는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메시지다. 김형주 감독은 “바둑들 모르는 분들도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토대 위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며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세상에 내놓게 됐다. 있는 그대로의 영화를 봐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