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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이젠 국가대표 선수와 붉은악마 갈등까지... 난장판 된 한국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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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5일 팔레스타인과 무승부를 거둔 후 손흥민(가운데), 김민재(오른쪽) 등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아쉬워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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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팔레스타인의 북중미 월드컵 3차 예선 1차전이 펼쳐진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 0대0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FIFA 랭킹 96위 팀(팔레스타인)에게 한국(23위)이 이렇게까지 고전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졸전이었던 셈이다.

그 야유 상당수는 이날 10년 만에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첫 경기에 나선 홍명보(55) 대표팀 감독을 겨냥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절차를 적잖이 무시했다. 감독 선임 기능을 담당하는 전력강화위원회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이사회 의결 과정도 건너 뛰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홍 감독은 현역 K리그 팀을 지휘하던 와중에 팀을 버리고 떠난다는 비난을 샀고, 더구나 과거 대표팀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자주 공언했던 대목이 더 공분을 샀다. 피노키홍이란 조롱이 나온 이유다.

홍 감독으로선 이날 경기에서 반전이 필요했다. 약체인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대승이 절실했다. 그래야 비난 강도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더 실망스러웠다. 지난 1~2월 아시안컵에서 말레이시아(당시 130위)와 비기고, 요르단(87위)에겐 예선 무승부, 4강전 완패라는 악몽을 겪었는데 7개월만에 다시 그 무기력한 장면이 되풀이된 격이다. 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들 중 일부도 실망한 나머지 푸념과 야유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 때 대표팀 간판 수비수 김민재(28·바이에른 뮌헨)가 붉은악마 응원석을 향해 걸어갔다. 팔 동작을 하면서 야유를 자제해달라고 요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허리춤에 양팔을 올리고 응원석을 향해 “부탁드릴게요”라고 외쳤다.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느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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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재가 경기 직후 관중석으로 다가가 팬들에게 말을 건넨 후 멀어지는 모습. /유튜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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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난 김민재는 “일부 팬들이 우리가 못하길 바라고 응원하는게 아쉬워서 그랬다. 우리가 처음부터 못한 게 아니었는데 야유가 들렸다”고 말했다. 대표팀 경기력은 물론 이날 기대에 못 미쳤다. 슈팅수 12대8, 유효슈팅 5대3. 96위팀을 상대로 홈에서 한 골도 못 넣은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시작도 하기 전부터 야유부터 퍼부은 팬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들었던 듯 하다. 김민재는 “전혀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선수들을 응원해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이라면서도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일 분은 그러면 된다”고 덧붙였다. 표현은 안 했지만 불쾌한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사실 이날 야유는 홍 감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대상이었다. 양 팀 선수단 소개 때와 경기 도중 홍 감독이 전광판에 비춰질 때마다 “우~”하는 야유가 터졌고, 북소리에 맞춰 “정몽규 나가!”라는 구호도 나왔다. “한국 축구의 암흑시대” “피노키홍” “선수는 1류, 회장은?” 등 비판 문구를 적은 걸개도 등장했다.

선수들로선 비록 자신들을 향한 비판은 아니었지만, 경기 내내 어디선가 야유가 계속 들려오면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다. 더구나 홈 구장이다. 김민재는 이런 분위기가 내심 거북했던 모양이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불만을 대놓고 표출한 이유다.

그러자 축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반박성 비난이 줄을 이었다. “야유도 선수가 감당해야 할 문제” “야유 받았다고 관중석에 달려오는 선수가 어디 있나” “소속 팀에서 비판 받을 땐 한마디도 안하더니 한국 팬들이 만만한가” 등 내용이다. 일부 팬들은 김민재 소셜미디어에 몰려가 비난 댓글을 달기도 했다. “선수들을 향한 게 절대 아니다. 절차를 무시하고 감독 자리에 오른 홍명보를 향한 것”이란 해명도 달렸다. 반대로 “김민재가 욕 먹을 이유가 없다. 야유가 과했다” “홈 경기에서 지길 바라는 듯이 야유를 보내는 건 미개한 짓” 등 반박도 뒤따랐다.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마지막 무대 첫 단추는 일단 불안하게 꿰어졌다. 지난 아시안컵 실패 이후 한국 축구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 외유와 재택근무 논란, 그리고 전격 경질, 아시안컵 때 주축 선수 손흥민과 이강인의 충돌, 잇따른 성적 부진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후임 감독 선임 과정에서도 미숙한 전력강화위원회 운영, 절차를 무시한 홍 감독 선임 등이 이어지면서 논란은 계속 커지는 양상이다.

박주호·박지성·이천수 등 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축구협회와 홍 감독을 향해 비판을 겨누면서 축구계 내부도 사분오열됐다. 우여곡절 끝에 출항한 홍명보호는 첫 경기부터, 그 것도 전력이 한참 아래라는 상대에게 저조한 경기력을 보인데다 선수와 응원단이 갈등을 빚기까지 하면서 분위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흐름으로는 10일 오만(76위) 원정 경기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오만은 비록 오래된 과거 일이지만 2003년 10월 아시안컵 2차 예선 원정 경기에서 한국에 1대3 참패를 안긴 이른바 ‘오만 쇼크’를 안긴 팀이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로는 낙승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오만은 일단 1차전에서 이라크에 0대1로 져 1패를 안고 한국을 맞는다.

대표팀 선수들은 축구 팬들을 향해 “응원과 격려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주장 손흥민은 “팬들이 원하는 감독이 있었겠지만, 이미 (감독 선임은) 결정된 일이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라며 “주장으로서 팀을 생각해서 팬들께 응원과 사랑을 부탁드린다. 감독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민재 같은 사례가 다신 나오지 말아야 한다. 팬과 선수는 좋은 관계로 함께 뭉쳐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원해야 한다”며 “적어도 홈 경기에서만큼은 선수들에게 한마디씩 좋은 얘기로 격려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강인 역시 “감독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첫 경기였는데 응원이 아닌 야유로 시작해서 매우 안타깝다”며 “선수들은 감독님을 100% 믿고 따를 것이다. 팬들은 당연히 많이 아쉽고 화가 나겠지만 그래도 많은 응원과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같은 날 일본(18위)은 홈에서 중국(87위)을 7대0으로 대파했다. 여러모로 한국과 너무 대조적이다.

[김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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