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학습 효과 더해지면서 상향 평준화
과거 존재했던 ‘이름값’ 프리미엄 사라져
세계 바둑 호령했던 K바둑, 위기설도 ‘솔솔’
대만의 쉬하오홍(오른쪽) 9단이 지난 4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던 ‘제10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의 리진청 9단에게 승리, 이 대회 4강에 올랐다. 대만 선수가 세계 메이저 기전 4강에 오른 사례는 2007년 ‘제11회 LG배 기왕전’에서 당시 27세로 우승을 차지한 저우쥔신 9단 이후 17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기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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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해진 상향 평준화 양상입니다.”
판세를 분석한 맥락은 동일했다. 기존 흐름에선 벗어난 이상 기류를 간파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특히 이런 판도 변화의 중심엔 인공지능(AI)이 자리하고 있단 측면에서 향후 반상(盤上)에 불어닥칠 AI발 새판짜기도 한층 더 가속화될 조짐이다.
세계 무대에서 감지된 반상 반란이 심상치 않다. 사실상 한국과 중국 중심으로 고착화됐던 양강 구도에 균열 징후가 감지되면서다. 일본과 대만의 약진세로부터 불거진 이런 분위기 탓에 일각에선 벌써부터 지각변동까지 점쳐지고 있다.
11일 한국기원에 따르면 일본과 대만 바둑의 강세는 최근 벌어진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 잇따라 확인됐다. 당장, 현재 진행 중인 ‘제10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우승상금 5억5,000만 원)에서 대만의 쉬하오훙(23) 9단이 4강에 진입했다. 대만의 세계 메이저 기전 4강 사례는 2007년 ‘제11회 LG배 기왕전’(우승상금 3억 원)에서 당시 27세로 우승을 차지한 저우쥔신 9단 이후 17년 만에 처음이다. 쉬하오홍 9단은 지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바둑 개인전에서 한국 바둑의 간판인 신진서(24) 9단과 박정환(31) 9단에 이어 중국 바둑계 거물인 커제(27) 9단까지 잇따라 따돌리고 금메달을 거머쥔 대만 바둑의 아이콘이다.
일본의 이치리키 료(오른쪽) 9단이 지난 9일 중국 저장성에서 벌어졌던 ‘제10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준결승 3번기(3판2선승제)에서 중국 바둑의 간판스타인 커제 9단에게 첫 판을 내줬지만 2,3국을 잇따라 승리하면서 2승1패로 결승행 티켓까지 따냈다. 일본의 세계 메이저 기전 결승 진출은 지난 2018년 ‘제22회 LG배 기왕전’ 이후 8년 만이다. 당시, 이야마 유타 9단은 중국의 셰얼하오(26) 9단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국기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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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잔칫집 분위기다. 이야마 유타(35) 9단은 지난달 ‘제2회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우승상금 3억2,000만 원) 4강에 올랐고 이치리키 료(27) 9단은 ‘제10회 응씨배’에서 커제 9단에게 승리, 결승 티켓까지 따냈다. 일본의 세계 메이저 기전 결승 진출은 지난 2018년 ‘제22회 LG배 기왕전’ 이후 8년 만이다. 당시, 이야마 유타 9단은 중국의 강자인 셰얼하오(26) 9단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 때, 세계 반상의 중심이었지만 시대 흐름과 동떨어진 과거 장고 대국 방식에 매몰, 변방으로 전락했던 일본 바둑이 부활한 모양새다.
여자 바둑계에도 일본 돌풍은 거세다. 대표주자는 우에노 아사미(23) 5단이다. ‘제10회 응씨배’ 본선에서 한국 랭킹 2위인 박정환 9단에게 종국 직전까지 다 이겼던 바둑을 아깝게 반집 차이로 놓쳤지만 ‘제2회 란커배’에선 2018년 ‘LG배 기왕전’ 우승과 지난해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우승상금 3억 원) 준우승을 차지했던 셰얼하오 9단에게 승리, 존재감도 입증했다. 우에노 아사미 5단은 이어 지난달 말, 마무리된 ‘제10회 황룡사배 세계여자바둑대회’(우승상금 30만 위안, 한화 약 5,700만 원)에서 한국 대표팀 에이스인 최정(28) 9단 등도 누르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016년 3월 12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벌였던 세기의 맞대결 3차전에서 이세돌 9단이 대국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당시 알파고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이세돌 9단에게 4승1패로 압승했다. 구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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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대만과 일본 바둑의 이런 급성장세 원인을 AI에서 찾고 있다. 그동안 한 수 위로 평가된 한국이나 중국 선수와 실전 대국시, 위축됐던 심리적인 ‘마인드컨트롤’ 능력이 AI 특훈으로 보강됐단 진단이다. 실제 일부 기사의 경우엔 AI와 수 천 판의 대국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AI가 반상 기력의 상향 평준화를 가져온 셈이다. 현 한국 바둑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 관계자는 “대만과 일본 바둑의 급성장 배경엔 AI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인간계를 넘어선 AI와 강도 높은 훈련 효과가 세계 대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 같다”고 전했다. 바둑과 AI의 인연은 8년 전부터 시작됐다. 2016년 출몰한 구글 딥마인드 바둑 AI인 ‘알파고’가 인간계 대표 천재 기사로도 유명한 이세돌 9단에게 4승 1패로 완승, 충격파를 던지면서다.
다만, 대만과 일본 바둑의 수직 상승세에 따른 여파는 K바둑계엔 또 다른 숙제를 가져왔다. 올해 4개의 세계 메이저 기전 가운데 이미 3개(LG배 기왕전, 춘란배, 응씨배) 대회에서 탈락한 신진서 9단이나 ‘제10회 황룡사배’에서 1승 6패로 최하위까지 추락한 최정 9단의 부진이 대만과 일본의 급성장세와 무관치 않아서다. 신진서 9단과 최정 9단은 현재 남녀 세계 바둑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바둑 TV 해설 위원인 한 중견 프로바둑 기사는 “AI가 4000년 넘게 이어왔던 바둑계의 기본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있다”며 “현재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 바둑도 이젠 ‘1인자’ 자리를 장담할 순 없게 됐다”고 말했다.
허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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